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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Nov 21. 2019

무질서해져 가는 말

짚라인? 짚트랙?

말에 관한 무질서가 상당히 심각하다.

'짚라인', '짚트랙' 같은 말을 보고 특히 그걸 느낀다.


짚라인이나 짚트랙은 같은 말이다.

아직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남이섬에 가본 사람이라면 '아하! 그걸 집라인이라 하는구나' 할 것이다.

남이섬은 섬이다 보니 배를 타고 들어가거나 집라인을 타고 가거나 택일을 해야 한다.

사람이 공중에 걸린 줄에 매달려 미끄러져 내려가도록 만든 시설이 집라인이다.

스릴 만점이다.


엊그제 라오스의 관광지에서 집라인 사고로 한국인 관광객 1명이 사망했다.

공중에 걸린 줄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졌단다.

그 바람에 줄에 매달려 내려오던 사람이 땅바닥에 추락했고...

허술한 안전 시설 때문에 아까운 목숨이 희생됐다.


여기서 내 관심은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의 한글 표기에 있다.

'짚라인', '짚트랙'이 문제다.


'짚라인', '짚트랙'은 zip line, zip trek을 한글로 옮긴 것이다.

zip은 '집'이지 '짚'이 아니다.

trek은 '트렉'이지 '트랙'이 아니다.


외래어를 한글로 적다 보면 이런 저런 혼선과 혼란이 빚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걸 방지하고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외래어 표기법이다.

'집라인'이라고 쓰나 '짚라인'이라고 쓰나 발음은 같다.

국어에서 'ㅂ'과 'ㅍ'은 단어 끝에 올 때 발음이 같아지는데 이를 '중화'라 한다.


그리고 외래어 표기법은 외래어를 적을 때 받침에 'ㄱ, ㅅ, ㅂ'을 써야지

'ㅋ, ㅌ, ㅍ'을 써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핸드붘'이라 써서는 안 되고 '핸드북'이라 써야 하고

'디스켙'이라 써서는 안 되고 '디스켓'이라 써야 하고

'커피숖'이라 써서는 안 되고 '커피숍'이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받침에 'ㅋ, ㅌ, ㅍ'을 쓰지 말아야 하는 규칙에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예외가 있다면 뭐가 예외인지를 기억해야 하지만 예외가 없으니 기억할 것도 없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짚라인', '짚트랙' 같은 말이 버젓이 쓰이고 있다.

외래어 표기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집'이라고 하면 '家(house)'가 연상될까봐 부득이 외래어 표기법을 어기고 '짚'을 쓰는 걸까.

아니면 외래어 표기법 따윈 중요치 않다고 봐서 그렇게 쓰는 걸까.

또 아니면 그런 외래어 표기법이 있는 줄을 알았으면 따랐을텐데 단지 몰라서 따르지 않았을까.


'짚라인', '짚트랙' 같이 외래어 표기법을 어기는 표기가 쓰이게 된 데는

'(주)창원짚트랙' 같은 회사명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회사명은 고유명사다.

고유명사도 외래어 표기법을 지켜야 마땅하지만 

이 나라 외래어 표기법에 강제력이 없다 보니 표기법을 어긴 상호명도 버젓이 등록된다.

일단 등록만 되면 사람들이 그걸 따라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상호명 같은 고유명사가 외래어 표기법을 어기니

보통명사마저도 표기법을 어긴 채 쓰는 게 아닌가 싶다.


'짚라인'은 아마 외래어의 받침에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는 규칙을 어긴

최초의 사례가 아닌가 한다.


물론 아직 어떤 국어사전도 '짚라인'을 올리고 있지 않다.

표기법에 맞는 '집라인'도 아직 없다.


줄을 타고 하늘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이 신기구는 아직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다.

사전이란 현실을 반영하게 돼 있으므로 아마 머지 않아 국어사전에 오르게 될 터인데

'짚라인'으로 오를지 '집라인'으로 오를지 필자로서는 여간 궁금하지 않다.


외래어 표기법 제1장 제5항은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용례와 범위는 따로 정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온 신문, 방송에서 '짚라인'이라고 한다면 이미 '짚라인'으로 굳어졌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상호명이 '짚트렉'도 아닌 '트랙'을 쓰고 

덩달아 보통명사도 '라인'을 쓰는 현실을 보면서 착잡함을 금할 수 없다.


앞으로 누가 '초콜'이라고 쓰려고 할 때 뭘로 막겠는가.

외래어를 적을 때 받침에 'ㅋ, ㅌ, ㅍ' 따위를 쓰지 않는다는 규칙은 잘 만들어진 것이다.


규칙은 지키면 편하다.

편하지 않아도 좋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면 말리기 어렵다.

대신 말이 점점 무질서해져 간다.

종잡을 수 없게 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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