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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an 11. 2020

키킨다

1. 개관


키킨다는 세르비아 북부 보이보디나 지방의 북바나트주의 주도이다. 루마니아와의 국경에서 가깝다. 18세기에 세워진 키킨다는 1774년부터 1874년까지 합스부르크왕국의 자치 지역인 벨리카키킨다의 수도였고 1893년  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1918년 세르비아왕국의 일부가 되면서 시의 지위를 잃었다가 2016는 되찾았다. 1996년 시내 외곽에서 50만년 전 매머드의 시체가 잘 보존된 채 발굴되어 국립키킨다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시내에는 말의 힘으로 작동하는 옛 방앗간이 남아 있고 매년 10월에 열리는 호박의 날들과 국제조각심포지엄인 ‘테라’가 유명하다. 또 칡올빼미의 겨울 홰를 보기 위해 국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플라바바냐호수와 스타로호수는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즐겨 찾는 곳이다.     


2. 역사


키킨다시는 오래된 옛날 문화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고고학적 유물이 7천년 전 이상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거주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여러 가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사람들이 떠나고 다시 와서 살고 또 떠나는 일이 되풀이됐다. 


오늘날의 키킨다 지역에 두 개의 중요한 중세 정착지 갈라드와 홀로시가 있었다. 갈라드는 북바나트의 가장 오래된 슬라브 정착지 중 하나였고 9세기에 슬라브 군주 글라드에 의해 세워졌다. 1337년 갈라드는 거의 전적으로 세르비아인들이 살았던 정착지로 기록되었다. 이 정착지는 17세기말과 18세기초 오스트리아-오스만전쟁 때 파괴되었다. 다른 정착지인 홀로시는 17세기 오스만 지배 시기에 지방의 한 행정 중심지였다. 이 정착지도 17세기말에 파괴되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케케니라는 더 오래된 정착지가 이 지역에 존재했다. 코케니드라는 이름은 1423년에 헝가리왕 시기스문드의 소유로 기록된 것에서 처음 나타난다. 1558년에 이 정착지에 세르비아인들이 살았고 1594년에 바나트봉기 후에 버리고 떠났다. 


근대 키킨다의 역사는 25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751-1752년 현재의 키킨다가 위치한 지역에 사람들이 다시 와 살게 되었다. 맨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합스부르크의 국경 순찰대에서 근무한 세르비아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리시강과 티사강을 따라 세워진 오스만인들과의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합스부르크왕가와 오스만제국 사이에 맺어진 포자레바츠평화조약 후에 오스만은 바나트의 영토를 잃었고 그 결과 세르비아인들은 심각한 실업을 당하게 되었고 농업으로 생업을 영위하기 위해 새로운 정착지를 세웠다. 몇 십 년 뒤에 세르비아인과 함께 독일인, 헝가리인, 유대인들도 그 지역에 정착했다. 


정착지를 세운 후 약 20년 뒤인 1774년 11월 12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여제는 키킨다에 본부를 둔 특별한 봉건적 행정단위로 벨리코키킨드스키특별구역을 만들었다. 키킨다 외에 그 지역은 북바나트와 중부바나트에 9개의 세르비아 국경군대조직 정착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스릅스키크르스투르, 요제포보, 모크린, 카를로보, 바사이드, 브라네보, 멜렌치, 쿠마네와 타라시였다. 그 시기에 이들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상당한 경제적, 정치적 특권을 합스부르크왕가에서 갖고 있었다. 그 지역은 1876년까지 존속했다가 없어졌고 키킨다는 오늘날 세르비아 바나트의 영역을 대부분 포함한 벨리키베치케레크에 본부를 둔 토론탈군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br><br>1848/1849년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 봉기가 발생했다. 키킨다 시민들은 일사불란하게 사회적 반란을 일으켰고 나중에 봉기는 민족적인 규모로 바뀌어 키킨다는 오스트리아제국 안의 세르비아 자치지역인 세르비아보이보드십의 일부가 되었다. 전쟁 중에 키킨다에 대한 지배권은 세르비아 정부와 헝가리 정부가 번갈아 가졌고 이는 고통과 파괴를 수반했다. 이때가 키킨다 역사상 가장 어렵고 복잡한 기간 중 하나였다. 1849년과 1860년 사이에 키킨다는 세르비아와 테메스바나트의 보이보드십의 일부였다. 


세게드, 키킨다와 티미쇼아라를 잇는 철도가 1857년 놓였고 이 철도는 오늘날 세르비아와 전 남동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로서 베오그라드의 철도보다 27년이나 앞섰다. 키킨다에 그때 15,000명이 살았다. 최초의 열차는 1857년 11월 15일 오후 3시에 아직 채 완공도 되지 않은 역에 도착했다. 철도는 벤-브라티슬라바-부다페스트-티미쇼아라-바지아슈를 잇는 장장 700km의 긴 노선의 일부였다. 첫 열차가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소식이 알려졌고 엄청난 인파가 도착 행사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철도 건설로 농토를 수용당한 농부들은 보상에 만족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기차에서 나오는 연기가 독이 있고, 바퀴의 스파크로 논밭에 불이 날 것이며 증기기관차가 내뿜는 소음이 소를 놀라게 할 것이라는 얘기를 퍼뜨렸다. 그러나 철도는 키킨다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증기 제분소와 벽돌공장을 포함해서 각종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19세기말에 벨리키베치케레크가 키킨다를 건너뛰고 직접 세게드와 연결되자 경제가 침체되었다. 1953년 티사강 위의 다리가 파괴되자 세게드와의 연결이 끊겼다. 티미쇼아라와의 연결은 2015년까지 레일버스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1872년 철도를 이용해서 키킨다를 방문했고 이 철도는 오리엔트특급열차의 노선으로도 이용됐다. 2017년 현재 열차는 수보티차와 즈레냐닌까지만 운행된다. 19세기말에 키킨다는 22,000명의 주민이 살아 토론탈군에서 가장 인구가 조밀한 곳이었다. 19세기말에서 제1차세계대전 초까지의 기간은 키킨다의 역사에서 평화롭고 풍요로운 기간이었으며 강력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도시의 핵심이 형성되었고 키킨다는 1895년에 짜임새 있는 지방 정부를 갖게 되었다. 1910년 센서스에 따르면 키킨다의 인구는 26,795명이었고 그 중에서 14,214명이 세르비아어를 사용하는 사람, 5,968명이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사람, 5,855명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br><br>제1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 11월 20일 키킨다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일 가운데 하나가 일어났다. 세르비아군대가 키킨다를 세르비아와 합치기 위해 키킨다에 들어온 것이다. 1918년 12월 1일부터 키킨다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키킨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은 경제적 번영기가 아니었다. 1921년 키킨다의 인구는 25,774명이었고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15,000명(58%), 독일인이 5,500명(21%), 헝가리인이 4,000명(16%), 루마니아인이 5%였다. 1918년부터 1922년 사이에 키킨다는 바나트주에 속했다. 1922년과 1929년 사이에는 베오그라드주에 속했고 1929년부터 1941년부터는 다뉴브바노비나의 일부였다. 


겨우 20년 동안의 평화가 있은 후 1941년 키킨다는 제2차세계대전의 폭풍기를 맞았고 그 기간 동안 독일군에 점령됐다. 키킨다가 속했던 바나트 지역은 세르비아 내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고 그 지역의 독일 소수민의 지배 아래 놓였다. 키킨다는 1944년 10월 6일 해방되었고 1945년 이후에는 새로운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내의 보이보디나자치지방의 일부였다. <br><br>제2차세계대전 중과 그 후에 키킨다의 경제적, 정치적 조직 구조는 크게 변했다. 또한 인종 구조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독일인(약 22%)과 유대인(약 2%) 인구가 급감했다. 1940년에 키킨다에 유대인이 500명 있었다. 1941년 8월 그들은 베오그라드 근처의 사이미슈테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다. 1944년 독일인들 일부가 전쟁에서 진 독일군과 함께 키킨다에서 도망쳤다. 1944년에서 1948년 사이에 남아 있던 독일인들은 노동수용소에 억류됐다. 수용소가 해체된 후에 남은 독일인들 대부분은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찾아서 오스트리아와 독일로 떠났다. 제2차세계대전 얼마 뒤인 1948년 키킨다의 인구는 28,070명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키킨다는 지속적인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새로운 공장과 생산 시설, 새로운 주거 단지, 다양한 사회 단체, 포장 도로가 키킨다를 바꾸어 놓았다. 1971년 키킨다의 인구는 37,487명에 이르렀다. 2016년 3월 키킨다는 도시의 지위를 되찾았다.     


3. 경제


키킨다의 주된 산업은 농업으로 598km2의 경작지를 갖고 있다. 밀의 연간 생산량은 6만톤이고 해바라기씨앗의 연간 생산량은 114,670톤이다. 콩, 설탕, 사탕수수와 다른 과일, 채소들도 생산된다. 나프타가스, 금속가공, 기계공구, 자동차 부품, 지붕 타일과 벽돌, 화학 제품 등의 생산도 활발하다. 키킨다를 통과하는 바나츠코아란델로보-짐볼리아 철도는 세르비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철도이다. 키킨다는 수보티차와 베오그라드로도 철도 연결이 되어 있다. 주변 도시와 연결되는 도로망이 잘 갖추어져 있다. 다뉴브-티사-다뉴브운하의 수로가 키킨다를 통과한다.      


4. 도시경관


구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기 전에 사냥이 키킨다에서 성했다. 다뉴브-티사-다뉴브운하 주변의 300km2에 달하는 사냥 구역이 있어서 토끼, 꿩, 사슴 등의 사냥이 이루어졌다. 키킨다시 남쪽 입구에 플라바바냐라고 하는 인공 호수가 만들어졌다. 플라바바냐의 물은 광물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황산과 염화물 수준이 적합해 피부와 습진 같은 피부병에 좋다고 알려졌다. 2000년대초까지 호수에는 많은 레크리에이션 시설이 있었고 콘서트나 예술 행사들이 많이 열려서 사람들이 매일 수천 명씩 찾아왔다. 그러나 2017년 주인이 바뀐 후로 크게 위축되었지만 여전히 현지 사람들은 호수를 즐겨 찾는다. 플라바바냐 외에 시내 한복판 가까이에 스타로호수가 있다. 


수바차는 말이 움직이는 방앗간이다. 키킨다에 있는 이 방앗간은 유럽에 남아 있는 세 개의 말이 움직이는 방앗간 중 하나로 다른 두 개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 있다. 이런 방앗간이 1857년에는 키킨다에서만 51개가 있었다. 수바차 방앗간은 1899년에 세워져서 1945년까지 사용되었다. 


시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세르비아정교회는 1769년에 세워졌다. 성화벽의 그림은 1773년 야코브 오르펠린이 그렸다. 테오도르 일리치 체슐랴르는 ‘최후의 만찬’과 ‘예수그리스도의 승천’을 그렸다. 둘 다 후기 바로크식 성화벽으로 당시의 서유럽 미술의 영향을 보여준다. 새 교회 종은 1899년에 설치됐다. 세르비아삼위일체수도원은 키킨다 남쪽 외곽에 있다. 1885년과 1887년 사이에 멜라니야 니콜리치-가이치치의 재원으로 지어졌다. 

세르비아정교회


탐조가들 사이에서 키킨다는 칡올빼미의 겨울 홰를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홰는 시내 공원에 있어 쉽게 가볼 수 있다. 


키카라고 하는 매머드의 화석이 1996년 발견되었다. 키카는 암컷으로 키가 4m이고 몸무게가 15톤으로 추정된다. 키카는 이제까지 발견된 매머드 중에서 가장 큰 것 중 하나이지만 아직 그 종류가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키킨다는 유럽에서 칡올빼미의 주요 겨울나기 장소로 알려져 있다. 2017년 11월 238마리, 2009년 743마리가 키킨다에서 기록되었다. 


시내 광장에 있는 키킨다국립박물관은 1839년에 지어졌다. 처음에 박물관은 시 청사로 쓰였다. 1946년에 키킨다국립박물관과 시 문서고가 설립되어 이 건물에 들어왔다. 박물관에는 1996년 벽돌공장 바닥에서 발굴된 매머드 뼈가 전시되어 있다. 


요반포포비치국립도서관은 1845년에 치타오니차스릅스카로 세워졌다. 1952년에 키킨다 출신 유명 시인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 요반포포비치로 바뀌었다. 도서관은 책을 빌려주는 기본적인 기능 외에 도서관은 문학 모임, 책 홍보, 세미나, 강연, 전시 등 다양한 행사를 연다. 


키킨다국립극장은 50년 전에 세워졌지만 키킨다의 연극 전통은 길다. 키킨다에서는 1796년에 최초로 독일어 연극 공연이 있었다. 최초의 세르비아어 연극 공연은 1834년 행해졌다. 극장은 1년 내내 공연이 이어지고 여름에는 극장 뒤뜰 야외에 무대가 펼쳐진다. <br><br>호박의 날들은 10월 중순에 벌어지는 연례 행사다. 매년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키킨다에 모여서 누가 가장 큰 호박과 가장 긴 박을 가졌는지 시합을 한다. ‘루다야’라는 용어는 키킨다의 지역에 독특한 것으로 호박에 대한 보통의 세르비아어는 분데바이다. 키킨다 사람들은 밭에서 일하면서 전 시가지를 잘 보기 위해서는 호박 위에 서야 한다고 말하곤 했기 때문에 키킨다는 호박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 이런 과장은 이 지역의 땅이 평평하다는 걸 의미한다. 전통 복장을 입고 손으로 해를 가려서 멀리까지 볼 수 있게 한 사람은 이 지역의 상징이 되었다. 지역의 열성적인 사람들이 1986년 호박의 날들 경연을 시작했고 금세 전국의 호박 및 애호박 애호가들을 끌어모았다. 3일간의 행사에는 호박과 박 경작의 발전에 관한 강연과 세미나도 들어 있고 호박과 박 요리 경연, 어린이들의 탈과 조각품 만들기 경연과 다양한 콘서트와 전시도 펼쳐진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행사는 유명해져서 헝가리, 루마니아와 옛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이 행사에서 가장 큰 호박은 247kg이었고 가장 긴 박은 213cm였다. 2006년 이 행사는 20주년을 맞았고 사상 최대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1982년 이래 매년 6명에서 8명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가들이 국제적인 조각 심포지엄인 ‘테라’에 참가하기 위해 키킨다의 토자마르코비치 벽돌공장에 초대된다. 심포지엄은 7월 한 달 내내 열린다. 몇 년 동안 테라는 전세계로부터 조각가들을 불러들였다. 모든 조각품은 테라코타로 만들었고 어떤 것은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되었다. 300명 이상의 조각가가 이제까지 심포지엄에 참가했고 500개의 조각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테라’ 박물관이 2017년 12월 5일 문을 열었다. 1871년에 지어진, 말 타는 집 마네즈가 조각가 슬로보단 코이치에 의해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지어졌을 때 마네즈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말 훈련을 위해 쓰였고 빈에 있던 것 다음으로 제국에서 그런 시설로 두 번째로 컸다. ‘테라’ 전시는 세계에서 대형 사이즈의 테라코타 조각품 중에서 제일 큰 컬렉션이고 1967년 이후 세르비아의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다. 벽돌공장 안에 있었던 마네즈의 개조가 2012년 시작됐다. 2,100m2의 전시 공간 안에 1천 개의 조각품이 있다. 



빌라 리젠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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