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민법 개정
이 나라에 법률이 참 많습니다. 법률 중에 나이가 언급되지 않으면 안 되는 법률이 꽤 있는데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시기를 규정한 병역법, 취학 연령을 규정한 초.중등교육법, 청소년 보호에 관해 규정한 청소년 보호법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법률에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해 규정하면서 나이를 밝히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민법은 나이를 계산할 때 출생일을 산입하라고 하지만 이들 법률에서는 나이를 말할 때 출생일을 기준으로 하지 않습니다.
먼저 병역법을 봅니다.
제2조(정의 등)
① 이 법에서 사용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중략)
② 이 법에서 병역의무의 이행시기를 연령으로 표시한 경우 “○○세부터”란 그 연령이 되는 해의 1월 1일부터를, “○○세까지”란 그 연령이 되는 해의 12월 31일까지를 말한다.
민법에 따르면 '○○세부터'란 그 연령이 되는 날부터를 의미하는데 병역법에서는 그 연령이 되는 해의 1월 1일부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만 나이가 아니라 연 나이를 적용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초.중등교육법은 어떨까요?
제13조(취학 의무)
① 모든 국민은 보호하는 자녀 또는 아동이 6세가 된 날이 속하는 해의 다음 해 3월 1일에 그 자녀 또는 아동을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야 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니게 하여야 한다.
초.중등교육법 역시 7세가 되는 해의 3월 1일에 보호하는 자녀 또는 아동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만 나이가 아니라 연 나이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보호법도 같습니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청소년”이란 만 19세 미만인 사람을 말한다. 다만, 만 19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을 맞이한 사람은 제외한다.
청소년이란 만 19세 미만인 사람, 즉 만 19세 생일을 맞기 전인 사람이라 규정합니다. 그런데 '다만'을 보면 만 19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을 맞이한 사람은 청소년에서 제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 19세 생일이 되기 전이라도 그해 1월 1일만 되면 청소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연 나이를 적용한다는 뜻입니다.
병역법, 초.중등교육법, 청소년 보호법에서 연 나이를 쓰도록 규정한 것은 만 나이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징병검사를 생각해 봅니다. 사람마다 생일이 다 다르고 징병검사일도 지역에 따라 다 다릅니다. 그런데 현재 병역법은 "병역의무자는 19세가 되는 해에 병역판정검사를 받아야" 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만 나이'를 적용하려면 "병역의무자는 19세 이후에 병역판정검사를 받아야" 하게 규정해야 하고 병역판정검사일과 자기 생일의 선후를 따져야 하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걸 할 수 없는 건 아니겠지만 일이 엄청나게 복잡해질 것입니다. 병역법, 초.중등교육법, 청소년 보호법 등에서 만 나이가 아니라 연 나이를 쓰도록 규정한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에 민법이 개정되어 내년 6월부터 시행되겠지만 병역법, 초.중등교육법, 청소년 보호법 등이 개정된다는 말이 없습니다. 개정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 나이, 연 나이, 집에서 세는 나이 중에서 민법은 이미 제정 당시부터 만 나이를 쓴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연 나이는 병역, 교육, 청소년 보호 등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집에서 세는 나이는 그야말로 집에서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며 쓰는 나이입니다. 이것은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강력한 습관은 법률을 개정한다고 바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방송에서 캠페인으로 이제 집에서 세는 한국식 나이를 쓰지 말자고 국민에게 호소하면 좀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이런 생활 습관을 바꾸기 위해 민법을 개정한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실제로 민법은 달라진 게 없기도 합니다. 표현이 바뀌었을 뿐 내용 자체는 그대로기 때문입니다.
만 나이 사용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새 정부 중점 추진과제로 제시한 것으로 정부에서 국정과제로 추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 나이는 병역, 교육, 청소년 정책 등에서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연 나이가 쓰입니다. 신문에서도 연 나이를 쓰고 있고 이를 '신문 나이'라고도 한답니다. 결국 국민 생활 속의 오랜 습관인 '세는 나이'를 만 나이로 바꾸자는 것인데 이게 왜 '국정'과제인지 모르겠습니다. 국민 생활습관 변화도 국정과제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국정과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이번 민법 개정을 지켜보며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태산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는데 나타난 것은 쥐 한 마리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