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서점에 글쓰기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 있다. 글쓰기에 관한 관심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의 글이란 무엇인가. 일기도 글이고 편지도 글이다. 판사의 판결문도 글이고 신문기자가 쓴 기사도 글이고 학자의 논문도 글이다. 관청이나 백화점의 안내문, 공지문도 글이다. 글의 종류가 참 많다. 이렇게 다양한 글이 있는데 두루 다 통하는 '좋은 글쓰기' 방도가 있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한 친구가 단톡방에 올린 글을 읽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동창들에게 명절을 앞두고 설 잘 쇠라고 인사를 한 것인데 어쩌면 이다지도 글을 못 쓸 수 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뭔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건 마치 한국말을 배우는 중에 있어서 아직 한국어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이 쓴 글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거의 암호 해독하는 듯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기를 쓰고 노력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제 명절에 여자들이 음식 준비하느라 힘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 같았다. 예전에는 사위가 처가에 와서 잘 대접받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사위가 처가에 가서 음식하는 게 맞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사위가 처가에 가서 소매 걷어 부치고 일하는 게 뭐가 어떤가. '에헴' 하고 앉아서 음식 상 차려져 나오길 기다리는 건 다분히 옛날 풍습이다 싶다.
그런데 여전히 그의 단톡방 글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명절에 "즐거운 나눔정 음식으로 형제자매가 정을 나눈다면 부모님께 복 받는 것..."이라고 하다가 "명절이라고 가족끼리 잠깐 모였다가 헤어지는 것처럼 얼굴 보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고 했는데 뭘 말하려는지 당최 알 수 없다. 명절에 형제자매가 모여 음식 먹으며 정을 나누는 게 좋은 일이라고 말하다가 명절에 잠깐 모여 얼굴 보고 헤어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듯이 말했기 때문이다. 명절에 형제들이 모이는 게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20여 년 전 일이다. 디지털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인데 필름이 필요 없는 카메라가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필름을 사서 카메라에 끼워 넣지 않아도 됐으니까. 내가 최초로 장만한 디지털 카메라는 화소가 35만 화소였다. 아무리 잘 찍어도 사진은 흐릿했다. 그게 100만, 200만, 천만, 2천만이 되더니 지금은 스마트폰 카메라의 화소가 1억이 넘는다고 들었다. 얼굴의 땀구멍까지 선명히 보인다.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글이 있는가 하면 단번에 선명하게 의미가 쏙 들어오는 글이 있다. 천차만별이다. 예전에는 한 반에 학생이 60명, 70명이었으니 작문을 시켜도 첨삭 지도가 가능하지 않았다. 그 많은 학생들이 쓴 글을 어찌 선생님이 다 봐줄 수 있나.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도시에도 20명 남짓이고 시골로 가면 전교생이 10명도 안 되는 학교도 있다. 학생보다 선생님이 더 많은 중고등학교도 있다고 한다.
국어 교과에서 작문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 글을 잘 써야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이 원활해진다. 글을 썼는데 무슨 뜻인지 남들이 알지 못한다면 그 글이 무슨 소용 있나. 본인은 자기가 쓴 글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