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올라온 지 52년이 지났다. 주로 북촌쪽에서 살고 활동해서 남촌엔 많이 가보지 않았다. 그래서 작심하고 남촌을 걸어보았다.
출발은 약수동 버티고개에서 했다. 한양도성순성길은 가벼운 산행 탐방로였다. 신라호텔이 바로 옆에 있었다. 장충동으로 내려와 태극당, 족발거리를 지나고 경동교회에 들렀다.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 유명한 경동교회는 창문이 없는 수도원풍의 건물이었다. 안에 들어가보지 못해 아쉬웠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부근 광희동사거리에서 마른내길로 접어들었다. 바로 맞닥뜨리는 중앙아시아거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글자부터가 온통 러시아어 글자인 키릴문자다. 몽골,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주무대인 듯하다. 베트남식당도 있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일대는 다문화사회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른내길은 퇴계로와 을지로 사이에 난 길인데 도로 폭도 넓고 차량 통행이 많은 퇴계로, 을지로와 달리 한적한 편이라 걷기 좋다. 도중에 오장동함흥냉면거리가 있다. 덕수중학교와 중구청 사이를 지나면 남북으로 길게 뻗은 상가와 만난다. 어느덧 명보아트홀에 이르면서 건물 벽에 소유주인 신영균 씨 동판이 새겨져 있다.
일부러 충무로역 방향으로 걸어 노포 식당인 진고개까지 가보았고 드디어 명동성당 앞에 이르렀다. 명동성당은 1898년에 건립되었다니 엄청나게 오래된 건물이다. 당시엔 본당밖에 없었겠지만 지금은 가톨릭회관을 비롯해 서울교구청 등 많은 관련 건물들이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하에도 상가를 비롯해 굉장한 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미사가 있진 않았지만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나도 잠시 앉아 있었다.
명동성당을 나와 내리막으로 걸으니 번화한 상점가다. 노포 식당인 하동관까지 가보았고 반대쪽으로 명동교자에 이르니 연휴건만 식당에 들어가려고 사람들이 선 줄이 골목까지 나와 있었다. 명동거리는 연휴가 아니었다. 외국인들도 꽤 있었고 여간 북적이지 않았다. 연휴니까 이 정도였지 보통 때 같았으면 굉장했을 것 같다.
한성화교소학교 앞을 지나니 중국대사관이 하늘 높이 우뚝 서 있었고 옛 코스모스백화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서 신세계백화점 앞 분수대에 이르러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한국은행은 고풍스런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바로 옆 중앙우체국은 옛 모습은 어디 가고 최신식 빌딩이 우뚝 서 있는데... 신세계백화점과 옛 제일은행 건물도 얼추 옛 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남대문시장으로 들어섰다. 일부 상점은 문을 열었고 일부는 문을 닫았다. 갈치조림골목도 그랬다. 숭례문(남대문)에 이르니 수문장 교대식이 한창이었다. 2008년초 홀랑 타 버린 걸 복원하느라 5년이나 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판은 타지 않았다는 것. 글씨가 매우 힘 있다.
걷다 보니 구 삼성본관 뒤까지 이르렀다. 삼성은 이제 거기 없는 모양이다. 부영 간판이 곳곳에 있었다. 건물은 주인이 자꾸 바뀐다. 서소문로를 건너 정동쪽으로 향했다. 배재학원의 최신식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고풍스런 모습이었고... 정동제일교회가 나타났는데 늘 한결같은 모습이다. 오래된 교회다.
정동극장 옆 추어탕집을 지나 중명전 앞까지 가보았다. 구한말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왼쪽은 미국대사의 관저인 하비브하우스다. 경비가 삼엄하다. 오른쪽은 덕수궁의 서쪽 문인 포덕문이고. 돈덕전 복원 공사가 거의 다 된 듯했다. 돈덕전은 구한말에 외빈 접대하던 건물이었다는데 없던 게 새로 생겼다. 그리고 곧 좌우로 샛길이 나 있었다. 새로 개방된 길이다.
덕수궁 돌담길이 완전히 뚫렸다. 전에는 영국대사관에 가로막혔는데 지금은 덕수궁 사이로 샛길이 나 있고 끝까지 걸으면 세실극장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서울시청이다. 세실극장 옥상에 올라가보았다. 고풍스러운 대한성공회 성당이 손에 잡힐 듯하고 덕수궁도 내려다보였다.
다시 덕수궁돌담길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고종의길로 들어갔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때 고종이 이 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는 것이다. 정동공원이 나왔다. 구러시아공사관 터다. 구러시아공사관은 탑만 하나 달랑 남아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지금 보수공사 중이었다.
부근에 구한말 외교 공관이 많았다. 러시아공사관뿐 아니라 프랑스공사관, 벨기에영사관도 있었단다. 구 벨기에영사관 자리에는 지금 캐나다대사관이 있다. 이화여고100주년기념관은 그 옛날 손탁호텔이었다 하고...
고개를 넘어 신문로에 이르렀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1930년부터 1968년까지 운행되었던 전차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가본다. 서울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울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잘 보여주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곤여전도>는 세계지도라는 뜻이다
붉은 원 안의 이건 뭘까. 사직공원 부근이 아닌가 싶은데 궁금하기 짝이 없다.
경성방송국은 남산으로 옮겨가기 전에 정동 부근(10번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아마 흔적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이 흥미진진한 박물관이 무료라니!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된다. 운종가(雲從街)를 아는가. 구름처럼 사람이 모였다 흩어지는 곳이라 해서 운종가라 하는데 정확히 어디서 어디까진지는 모르겠다. 아마 종로가 운종가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주마간산식으로 후다닥 보고 가긴 아깝다. 몇 차례건 와서 음미하면서 볼만한 데다. 지금은 강남이 더 번화하니 강남만을 따로 보여주는 강남역사박물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서울은 너무나 팽창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지나 경교장에 이르렀다.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다. 강북삼성병원 한가운데 있으면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문화재기 때문이다. 지하는 전시실이고 1층과 2층이 응접실, 회의실, 집무실, 침실이다. 일제강점기 때 거부였던 최창학의 건물이었다는데 김구 선생이 환국 후 이곳에서 지내다가 1949년 6월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한양도성순성길, 마른내로, 명동, 남대문시장, 숭례문, 정동, 덕수궁돌담길, 서울역사박물관, 경교장... 발품을 부지런히 판 덕에 서울을 많이 느껴 보았다. 옛 모습을 간직한 곳도 있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도 많았다. 이만큼이라도 보존되어 있으니 여간 다행이지 않다. 개발을 하더라도 흔적과 표시는 남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