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May 06. 2023

말에 대한 무관심 2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에는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 더러 있다. 제120조의 '건정'이 그렇고 제275조의 '좌석한다'가 그렇다. '건정'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이다. 뜻은 잠금장치인데 일본어에도 은 있어도 건정(鍵錠)이란 말은 없다. '좌석한다'는 제275조 제3항 "검사의 좌석과 피고인 및 변호인의 좌석은 대등하며, 법대의 좌우측에 마주 보고 위치하고, 증인의 좌석은 법대의 정면에 위치한다. 다만, 피고인신문을 하는 때에는 피고인은 증인석에 좌석한다."에 나오는 말인데 국어에 명사 '좌석'은 있어도 동사 '좌석하다'는 없는데 이 조항에는 '좌석한다'고 돼 있다. 그냥 '앉는다'고 하면 되는데 굳이 '좌석한다'고 했다. 법은 무게가 있어 보여야 하니 순우리말을 놓아 두고 없는 한자어를 만들어 쓴 것 같다.


형사소송법 제180조는 다음과 같다.


제180조(통역) 국어에 통하지 아니하는 자의 진술에는 통역인으로 하여금 통역하게 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조문은 일본 형사소송법 제175조를 거의 베끼다시피했다.


第百七十五条国語に通じない者に陳述をさせる場合には、通訳人に通訳を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


'국어에 통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국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말답게 '국어를 하지 못하는 자'나 '국어를 할 줄 모르는 자'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문제도 있다. 제294조의2 제1항은 다음과 같다.


제294조의2

①법원은 범죄로 인한 피해자 또는 그 법정대리인(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배우자ㆍ직계친족ㆍ형제자매를 포함한다. 이하 이 조에서 “피해자등”이라 한다)의 신청이 있는 때에는 그 피해자등을 증인으로 신문하여야 한다. 다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1. 삭제 

2. 피해자등 이미 당해 사건에 관하여 공판절차에서 충분히 진술하여 다시 진술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


'피해자등 이미 당해 사건에 관하여 공판절차에서 충분히 진술하여 다시 진술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라고 했는데 유심히 읽어 보면 '진술하여'의 주어가 '피해자등'임을 알 수 있는데 '피해자등'이 주어이면서 주격조사가 없다. '피해자등'라고 해야 할 것을 '피해자등'이라고 하고 말았다. 구어체가 아니라 엄격한 문어체 문장에서 조사가 생략되어 있다니 놀랍다.


제387조도 별로 다르지 않다.


 제387조(변론능력) 상고심에는 변호인 아니면 피고인을 위하여 변론하지 못한다.


'변호인 아니면 피고인을 위하여 변론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해도 무슨 뜻인지 누구나 알겠지만 '아니면'의 주어인 '변호인'에 조사가 빠져 있다. '변호인 아니면'이라 해야 반듯하다. 조사를 생략하거나 잘못 쓴 경우가 법조문에 종종 있다. 법조문은 대충 씌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장 바르고 정확해야 할 문장이 법조문이다. 말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바르지 않다면 주저 없이 고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딱한 노릇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말에 대한 무관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