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에서 인심 난다
점심을 먹고는 속초 시내를 지나 속초카페거리의 바다정원엘 갔는데 참 대단히 큰 카페였다. 김포에 새로 생긴 기네스북에 오른 호텔식 카페에 거의 버금갈 만큼 큰 카페였다.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미회로 유명한 식당으로 갔다. 전에 와본 집이다. 가자미가 참 보들보들하다. 무에 감자까지 푹 익어서 구수했다. 식당에서 나와 밤에 술 마시며 안주로 할 먹거리를 사러 속초관광수산시장으로 갔는데 닭강정이며 아바이순대 등 속초 명물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회거리를 사서 숙소인 고성군 토성면 켄싱턴리조트로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51년이 지났다. 이런 모임에 늘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친구들 중 둘이나 빠졌다. 한 사람은 최근 유명을 달리했고 다른 한 친구는 지금 심각하게 투병중 이어서다. 그들은 없었지만 모인 열 명은 연태주, 안동소주, 캔맥주 등을 권커니 자커니 하며 밤늦도록 떠들었다. 친구들이 음악에 그토록 밝을 줄이야! 삼인행에 필유아사란 말이 있는데 정말 친구들로부터 듣는 게 많았다. 한 친구가 Once upon a time in America란 영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렇게 판본이 여럿인 영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 4시간짜리가 있는가 하면 100분짜리도 있고 말이다. 로버트 드니로 이야기를 하다가 영화 얘기가 나왔고 거기서 제니퍼 코넬리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친구들은 정치에 대해서도 여간 관심이 크지 않았다. 다행히 견해가 달라 싸움에 이르는 일은 없었지만 정치에 대한 식견이 상당히 깊음을 알 수 있었다.
자정 지나 1시쯤 됐을 때 난 잠이 밀려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어 방으로 들어가 잤다. 3시쯤 돼서 용변을 위해 일어났는데 글쎄 세 사람이 그때까지도 열심히 대화하고 있지 뭔가. 그리도 할 말이 많단 말인가. 나야 곧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잤지만 이튿날 얘길 들어보니 그들은 3시 반에야 잤다고 했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니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지 재미가 없는데 억지로 그렇게 잠 안 자고 이야기할 리는 없다.
일찍 잔 난 일찍 깼고 홀로 산책에 나섰다. 목표는 아야진항이었다. 봉포항을 지나고 토성면 소재지를 지나고 청간정에 이르렀다. 조선조 명종 때 세워진 정자라 했는데 올라가 보니 '대통령 최규하'란 글씨가 쓰인 편액이 걸려 있었다. 1980년 여름에 쓴 글씨였다. 나라가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었던 때였는데 최 대통령은 고성에 와서 글씨를 남겼나 보다. 청간정을 지나 아야진까지 가서 발걸음을 되돌려 리조트로 향했다. 호텔 식당에서 뷔페식 아침을 먹고 일행은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설악산 소공원으로 향했다.
케이블카는 두 대가 교대로 부지런히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 케이블을 타본 지가 몇 년만인가. 20년쯤 전이 아니었나 싶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10분쯤 걸어 올라가니 넓은 바위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 권금성은 해발 700미터 정도다. 대청봉에 비하면 너무나 낮아 대청봉은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동쪽을 내려다보니 저 멀리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조망을 충분히 즐기고 내려왔다. 신흥사에 들렀는데 워낙 매끄럽게 단장을 해서 고풍스러운 느낌을 별로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점심을 먹으러 유명한 봉포머구리집으로 갔다. 이곳 역시 거의 10년 만에 온 듯하다. 예전에 왔을 적엔 허름한 단층집이었는데 이젠 4층의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식탁에서 화면을 터치해 주문을 하면 로봇이 음식을 식탁까지 배달해 준다. 식사를 마치면 그릇을 가지러 로봇이 온다. 그러나 로봇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었다. 많은 종업원이 필요했고 그중 거의 절반은 아시아계 외국인들이어서 여간 놀랍지 않았다. 내국인들을 채용하고 싶어도 일할 사람을 찾기 어려우니 이토록 많은 외국인들이 일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전날 속초관광수산시장에서도 똑똑히 보았다. 시장에도 외국인 점원이 많았던 것이다.
음식점 메뉴는 여간 다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격도 상당히 비쌌다. 17,000원부터 28,000원까지. 회가 듬뿍 들긴 했지만 만만찮은 가격이었다. 식사를 마치곤 건물 안의 3층 카페로 옮겨서 밀폐된 속닥한 공간에서 맘껏 떠들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다녔던 초등학교는 국립이었다. 공립이 아니었고 사립도 아니었다. 소도시라 사립이 없었고 국립이 곧 사립인 셈이었다. 입학해서 4학년까지 다닌 공립은 한 학년이 여덟 반에 한 반 70명이었는데 이 국립초등은 한 학년이 달랑 세 반이고, 한 반이 50명이었다. 한 학년이라야 150명이었는데 서로 거의 다 알았다. 동창생이라기보단 좀 커다란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졸업하고 50년도 더 지나 얼굴엔 주름이 파였어도 동심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괜한 말이 아님을 알겠다. 유복한 집에서 자란 사람들이 포용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나는 겨우 5학년 1년만 그 학교에서 다녔을 뿐이어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친구로 스스럼없이 받아주었다.
4학년까지 공립학교를 다니다가 어머닌 나를 5학년 1년은 국립학교로 전학을 시키셨고 6학년 올라오면서는 아예 집이 서울로 이사했다. 초등을 세 군데나 다닌 것이다. 5학년 1년 국립초등 다닌 건 내게 큰 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돌아가신 어머니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