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May 23. 2023

읽어서 이해가 안 되는 법조문

'불확정한'?

민법과 상법은 국가의 대표적인 기본법이다. 그런데 이들 법에는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 없는 조문이 더러 섞여 있다. 마치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 조문 같은 느낌마저 든다. 설마 그랬겠나마는.


먼저 민법부터 보자.


제387조(이행기와 이행지체) 채무이행의 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기한이 도래한 때로부터 지체책임이 있다. 채무이행의 불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기한이 도래함을 안 때로부터 지체책임이 있다.


'채무이행의 확정한 기한'이 무슨 뜻인가? '채무이행의 불확정한 기한'이 무슨 말인가? 나만 이 표현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나? 다른 사람들은 금세 이해하나? 잘 모르겠다. 아마 나처럼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왜 잘 이해가 되지 않을까? 간단하다. 문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비문이다. '확정한'은 동사 '확정하다'의 어간에 관형형 어미 '-ㄴ'이 붙은 말로 '확정하다'는 타동사이기 때문에 목적어가 있어야 하지만 위 조문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렇다고 형용사 '확정하다'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확정하다'의 경우에는 '불확정하다'가 형용사로서 국어사전에 올라 있기 때문에 문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뜻이 금방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불확정하다'가 국어사전에 형용사로 올라 있을 뿐 실제 형용사로 쓰이는 일이 거의 없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법이 워낙 낡은 표현과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 많아서 2015년 법무부는 법학 교수, 법조인들로 위원회를 구성해서 방대한 민법을 통째로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쓴 민법개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지만 국회가 처리하지 않는 바람에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 안에는 위 제387조 제1항이 이렇게 되어 있다.


제387조(이행기와 이행지체) 채무이행에 확정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기한이 도래한 때로부터 지체책임이 있다. 채무이행에 확정되지 않은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기한이 도래함을 안 때부터 지체책임이 있다.


어떤가? 확실히 다르지 않나. 현행 민법 조문은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 좀체 감을 잡기 어렵지만 이 개정안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확정된 기한이란 '0000년 00월 00일까지'를 말한다. 확정되지 않은 기한이란 '어떤 조건이 이루어지면'처럼 조건만 제시되었지 몇 년 몇 월 며칠이란 기한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이번에는 상법을 보자. 상법 638조는 보험계약을 정의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제638조(보험계약의 의의) 보험계약은 당사자 일방이 약정한 보험료를 지급하고 재산 또는 생명이나 신체에 불확정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 상대방이 일정한 보험금이나 그 밖의 급여를 지급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효력이 생긴다.


'생명이나 신체에 불확정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라고 했다. '불확정하다'가 국어사전에 형용사로 올라 있고 '일이나 계획 따위가 확실히 결정되어 있지 아니하다'라 뜻풀이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니 문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불확정하지 않은 사고가 있나? 미리 확실히 결정되어 있는 사고가 있단 말인가? 상법 제638조의 '불확정한 사고'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예기치 않은 사고'라고 하든지 그냥 '사고'라고 하면 된다 싶다. 왜 '불확정한 사고'라고 해서 이게 무슨 뜻인가 하고 궁금하게 만드나?


도대체 상법 제638조의 '불확정한 사고'는 무슨 뜻인가 궁금해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한 블로그에 이렇게 써 놓았다.


불확정한 사고 : 우연하게 발생한 사고


이 풀이가 맞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문맥상 맞는 거 같아 보이지만 더 궁금한 것은 '불확정한 사고'라는 희한한 표현을 누가, 왜 법조문에 썼을까 하는 것이다. '불확정한 사고'는 1962년 1월 20일 상법이 제정될 때부터 들어 있던 표현이다. 61년이 지났는데 요지부동 그대로다.




매거진의 이전글 속초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