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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May 29. 2023

6법의 문장

법조계의 보수성

대한민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법률이 몇 개나 있을까. 한 초임 변호사에게 물어보았다. 만 개쯤 있지 않을까요 하고 답했다. 한편으로 어느 대형 로펌의 고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 시행 중인 법률이 1,400개쯤 있다고.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우리나라에 법률이 몇 개나 되는지 잘 모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법률이 많다.


분명한 것은 '6법'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많은 법들 중에서 6 개의 법은 특별히 중요하기 때문에 6법이라고 한다. 6법전서라는 말은 예전부터 써오던 말이다. 6법은 헌법,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을 일컫는다. 이들 법은 우리나라의 많은 법률 중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편이다. 헌법은 1948년 7월에, 민법은 1958년, 형법은 1952년, 상법은 1962년, 민사소송법은 1960년, 형사소송법은 1954년에 제정, 공포되었다. 물론 일부 법률은 이들 법보다 먼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일테면 병역법은 1949년에 제정되었다.


6법은 시기적으로도 앞설 뿐 아니라 중요도 면에서 다른 법률들을 압도한다. 기본적인 법이기 때문이다. 헌법을 제외하면 민법은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다. 이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민법은 모든 법률들의 원류라고 할 정도니 말이다. 그리고 그 민법 안에서도 제2조 제1항은 특히 중요한 조항이다. 다음과 같다.


제2조(신의성실)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법률 조문이라기보다는 무슨 도덕률이나 헌장 문장처럼 보이는 이 조항은 너무나 유명해서 법대생들은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접하는 조항이라 안다. 이 조항을 모르는 법조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땅에서 지금 법조인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물론 이미 법조인 생활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라는 짧은 문장은 한국어다운 문장인가?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신의에 좇아'는 국어에서 쓰는 말인가? 그렇다고 답할 사람이 과연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좇다'는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타동사인데 '신의 좇아'라 하지 않고 '신의 좇아'라 했으니 '좇다'의 용법에 맞지 않는다. 문법이 어그러졌다. 그러함에도 1958년에 민법이 제정된 이래 지금껏 이 조항은 요지부동 그대로 있다. 


왜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와 같은 괴상한 문장이 민법 앞자리에 자리잡게 되었을까.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일본 민법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착오였다. 일본 민법의 제1조 제2항은 다음과 같다.


第一条

 権利の行使及び義務の履行は、信義に従い誠実に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일본 민법 조문의 '信義に従い'를 '신의에 좇아'로 번역한 것이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이다. 일본어에서는 '~に従い'가 일본어 문법에 맞지만 국어문법에서는 '~을 좇다'가 맞다. 그 이전에 ''을 '좇다'로 번역한 것부터가 잘한 일이 아니었다. '신의를 지켜'나 '신의에 따라'라고 해야 옳았다. 이 '좇을 종'이니 '신의에 좇아'라고 한 것인데 이런 일본어 오역이 민법 제정 65년이 지나고, 광복 78년을 맞는 지금도 남아 있음은 경이로울 뿐 아니라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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