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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May 31. 2023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초등학생도 이렇게는 안 쓴다

민법총칙의 제5장은 법률행위인데 그 중 제3절은 대리에 관한 규정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내 일을 내가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주변 지인에게 대신 해 달라고 맡길 수 있다. 그게 대리다. 그런데 대리에 관한 규정 중에서 희한한 조항이 있다. 제118조가 그러한데 다음과 같다.


제118조(대리권의 범위) 권한을 정하지 아니한 대리인은 다음 각호의 행위만을 할 수 있다.

1. 보존행위

2. 대리의 목적인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그 이용 또는 개량하는 행위


대리인에게 대리를 부탁할 때 대리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정해 줄 수도 있고 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해 주었을 때야 정해 준 대로 하면 되니까 문제가 없는데 정하지 않았을 때 대리인은 어디까지 대리할 수 있을지가 문제가 된다. 제118조는 그에 대한 규정이다. 쉽게 말하면 보존행위나 이용, 개량 행위까지만 할 수 있지 예컨대 팔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파는 것까지도 할 수 있게 미리 권한을 주었다면 당연히 파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에는 보존행위와 이용, 개량 행위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제118조다.


그런데 제118조 제2호의 표현을 보자.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라고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변하다'는 '사람이 변하다', '마음이 변하다'에서 보는 것처럼 자동사여서 목적어를 취할 수 없는 동사이다. 그런데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라니! 좀 속되게 말하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민법 제118조 제2호의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는 초등학생도 이렇게 쓰지는 않을 표현이다. 그런데 1958년 2월에 제정, 공포된 민법에서 이렇게 돼 있었고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다. 2015년에 법무부가 민법을 통째로 뜯어 고쳐 낡고 틀린 표현을 바로잡은 민법 개정안에는 이 부분이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게 하지 않는 범위에서'로 고쳐졌지만 국회에서 이 개정안을 통과시키지 않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됐다. 그래서 지금도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국회의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법률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민법에 말이 안 되는 조문이 있는데도 모두가 눈을 감고 있다. 내버려두고 있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인가. 기가 찰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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