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동에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다녀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무악재에 있는 임시정부기념관, 국회 안에 있는 국회박물관에 이은 기념관 나들이였다.
내 어렸을 때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였다. 그의 단단하고 낭랑한 목소리를 뉴스에서 곧잘 듣곤 했다. 광복절 기념식 같은 땐 으레 그의 육성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 나왔다. 그런 그가 내가 대학 1학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사실을 알리는 첫 기사의 제목도 '사망'이나 '서거', '별세'가 '유고(有故)'였다. '유고'는 생전 처음 들어보던 말이었다. 유고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유고는 서거로 바뀌었다.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다양하다. 극과 극이 존재한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역시 박 대통령을 생각할 때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스럽고 막막할 때가 있다. 우선 부정적인 면을 보자. 목숨을 걸고 5.16 혁명을 일으켰을 때 혁명공약 맨 마지막은 이랬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군사혁명은 일으켰지만 혁명 과업이 성취되면 본연의 임무, 즉 군으로 복귀한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재선만 할 수 있는 헌법을 고쳐 3선 개헌을 한 것까지는 그렇다 해도 10월 유신은 정말 전형적인 민주주의의 파괴였다. 종신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연 헌법안을 만들어 억압적인 분위기 아래서 통과시켰다. 각종 긴급조치로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을 사형선고 다음날 처형한 것은 세계사법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란다.
이런 어두운 이면이 있는 한편 그는 집권 18년 동안 조국 근대화를 위해 신명을 바쳤다. 그는 참으로 부지런했다. 끊임없이 회의를 주재하고 지시하고 현장을 순시했다. 그의 재임 중 4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수립, 시행되었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나라가 공업을 발전시키고 수출에 매진해 선진국으로 가는 발판이 마련됐다. 대한민국은 실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했다. 새마을운동을 빼놓을 수 없고 산림녹화를 잊을 수 없다.
10월유신이라는 반민주적인 비상조치를 선포하면서 그는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을 외쳤다. 회초리를 들면서 당근을 제시한 것이다. 나를 따라오라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4년이 가까워 온다.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은 지 오래다. 오늘날의 풍요는 60, 70년대 고도성장 시대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누가 부인하랴. 지금은 거미줄 같이 고속도로망이 깔렸지만 박 대통령이 60년대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하니 야당에서는 한사코 반대하고 나섰다. 그 반대를 누르고 불과 2년 반만에 428km의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사회적 인프라가 차곡차곡 구축되기 시작했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이런 치적이 잘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20대와 30대에 대해서는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일본육사에 언제 입학해서 언제 졸업했는지도 알 수 없었고 남로당 관련해서 어떤 활동으로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도 언급이 없었다. 인권 유린의 역사는 물론 없다. 감추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정치지도자의 일생에 어찌 명만 있고 암이 없을까. 암마저도 당당히 밝힐 수 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건립이 시작됐지만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국고 보조가 중단돼 공사가 멈췄다. 그러다가 이명박 대통령 시기에 개관할 수 있었다. 넓은 공간에 큼직하게 잘 지었다. 서울의 한쪽 구석에 자리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훌륭하다. 우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기념관도 필요하다 생각한다.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 알 수 있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