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Jun 11. 2023

서울엔 볼 게 많다

유서 깊은 정동

토요일 낮에 지인 혼례식이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성당에서 있었다. 결혼식만 보고 돌아오기엔 정동이란 데가 너무나 유서 깊은 곳이다. 그래서 아예 계획을 세웠다. 결혼식 보러 간 김에 이곳저곳 둘러보리라 하고...


맨 처음 간 곳이 덕수궁 안에 있는 대한제국역사관이었다. 거긴 20여 년 전에 궁중유물전시관이라 하던 곳이었다. 궁중유물전시관이 경복궁 안으로 고궁박물관이라 이름을 바꾸어 옮겨갔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역사관이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아뿔싸! 사전예약을 하지 않고 갔기에 입장할 수 없었다. 대신에 예약 없이도 들어갈 수 있는 지하 전시관만 둘러보았다.


지하 전시관에서 대한제국의 흔적을 조금 맛볼 수 있었다. 대한제국이란 무엇인가. 1897년에 고종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선언한 제국이다. 기상은 높았고 포부는 컸다. 포부에만 그친 게 아니라 대한제국은 선포 후 몇 해 동안 눈부신 업적을 많이 이루었다. 아시아 최초의 전기철도가 1899년 서울에 생겼다. 이를 위해 현재 JW매리엇호텔이 있는 동대문 앞에 화력발전소가 세워졌다. 은행이 생기고 장거리전화가 개통됐다. 대한제국 깨 이뤄진 눈부신 업적이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그 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꺾은 후로 대한제국은 급속히 쇠망해 갔다. 결국 1910년 국권을 잃고 말았고.


대한제국역사관을 나오니 바로 앞에 돈덕전(惇德殿)이 우뚝 서 있었다. 이제 마무리공사가 한창인 듯했다. 오는 9월이면 개관한단다. 대한제국 시기에 외국 사절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기 위해 지은 건물인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물을 고증을 토대로 새로 지었다. 어서 9월이 오길 기대한다.


덕수궁을 나와 고개 너머에 있는 구세군박물관에 갔다. 구세군의 역사를 잘 알 수 있었다. 창시자 윌리엄 부스가 살았던 19세기 영국은 참으로 비참했던 것 같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전쟁을 하듯 구호와 봉사 활동을 했고 전세계에 구세군을 퍼뜨렸다. 한국에서 구세군은 1908년에 시작되었다. 지금도 구세군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 구세군중앙회관 건물은 1928년에 완공되었고. 구세군의 독립투쟁 활동도 잘 전시되어 있었다.



고종의 길을 통과해 구러시아공사관 앞을 지나 이화박물관을 찾았다. 이화학당은 1886년에 문을 열었으니 140년이 가까워 온다. 처음에 학생 한 명으로 시작했단다. 그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줄기를 뻗어 나갔다. 유관순도 이화학당 출신, 이화가 배출한 인물은 셀 수가 없다. 친절한 직원에게 이화여대에도 이런 박물관이 있냐고 물으니 아마 있을 거라 했다. 이화박물관은 이화여고에 있다. 손탁호텔 자리가 어디냐 하니 이화박물관 건너편이라 알려 주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와서는 국토발전전시관에 들어갔다. 국토교통부에서 국토개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전시관이다. 거기서 아주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했다. 버스 토큰과 버스 회수권이 그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요즘 학생들이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이 들까. 이게 무슨 물건인고 할 것이다. 국토는 천지개벽을 했다.



농업박물관도 그닥 멀지 않았다. 그곳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마치 용인의 민속촌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온갖 농기구가 다 있었고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살던 모습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었다. 옛 우리 모습을 알고 싶거든 농업박물관에 가보라고 하고 싶다. 아주 생생하다.



쌀박물관은 농업박물관 바로 옆에 있었다. 이곳은 단촐하지만 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쌀은 백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찹쌀, 현미, 흑미, 녹미, 적미까지 있었다. 벼농사는 중국에서 들어왔단다. 쌀만 먹던 시대에서 이젠 온갖 먹을 게 그득한 시대다. 그래서 쌀 농사도 맞춤형으로 짓는단다. 차별화된 쌀을 생산해야 먹히니까.


마지막으로 여러 번 가보았던 서울역사박물관을 또 찾았다. 1관부터 4관까지 차례로 서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 광장에 수선전도 새겨져 있다. 수선전도는 1820년대의 서울을 보여주는 지도인데 도대체 지명이 지금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거의 다 새로 생겼다. 가회동 정도가 오랜 역사를 증언했다.



시청역으로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덕수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였다. '경성방송국 터'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KBS의 뿌리인 경성방송국은 1920년대에 지금 덕수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방송의 역사가 100년이 가까워 온다. 최초의 방송국은 정동에서 시작됐다. 정동은 여간 유서 깊은 곳이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엔나협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