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안에 석조전이 있다. 이 서양식 건물은 대한제국 황제의 궁으로 지어졌다. 1900년에 착공되어 1910년에 완공되었는데 완공된 해에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그러니까 황궁은 황제가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일본에 가 있던 영친왕이 귀국했을 때 잠시 머무르는 용도로 쓰이다가 1930년대에는 미술관으로 활용되었고 1990년대에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도 쓰였다. 2014년부터는 대한제국역사관이다.
석조전 접견실
석조전
정원
석조전은 지층과 1, 2층 등 3개 층으로 되어 있다. 지층은 반지하 같은 느낌을 준다. 지층에 있는 전시관은 예약 없이 들어가볼 수 있지만 1, 2층은 인터넷 예약을 한 사람에게만 입장이 허용된다. 그리고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전문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다.
오늘 해설사의 깊이 있는 해설을 들으며 1, 2층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1층은 접견실, 대식당이 있고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 서재, 거실이 있다. 그런 용도로 지어졌지만 실제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하니, 아니 아예 사용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으니 이걸 왜 지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누군들 그리 빨리 국권을 잃을 줄 알았으랴.
대한제국의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고종은 조선을 임금의 나라에서 황제의 나라 대한국으로 격상시켰다. 청나라와 대등한 지위에 서고자 하였으니 어찌 꿈이 창대하지 않았나. 실제로도 광무개혁은 대단했다. 이 시기에 전차가 개통되었다. 일본보다 1년 빨리 되었다고 한다. 전차를 개통하고 전기를 보급하기 위해 동대문, 마포 등에 화력발전소를 세운 것도 대한제국 초기였다. 1900년 전후하여 많은 신문물이 도입되었다. 거기에는 고종황제의 의지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왜 급격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나. 러일전쟁을 분기점으로 그랬을 것이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대한제국의 꿈은 사그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고종황제는 마지막으로 국제사회에 호소하기로 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준 열사는 순국하고 말았다.
곧 이어 고종황제는 강제폐위당했고 순종황제가 즉위하고는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당했다. 이제는 백성이 가만 있지 않았다. 1908년 전국에서 의병들이 궐기했다. 그러나 의병 전쟁은 제압당하고 말았고 그해에 서대문형무소가 생겨 숱한 의병들이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지거나 형무소에 갇혔다.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마저 박탈당하고 1910년에는 나라가 강제병합되고 말았다.
석조전이 대한제국역사관이라고 하지만 이런 대한제국의 역사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1층과 2층에는 황제와 황후가 쓸 집기만 있지 그런 역사가 보이지 않고 어두컴컴한 지층 전시실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대한제국역사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이 1897년 10월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그 후 수년간 펼친 개혁은 눈부셨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의 몰락은 광속과 같았다. 러일전쟁이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이유가 단지 러일전쟁뿐이었을까.
오는 9월에는 돈덕전(惇德殿)이 공개된다고 한다. 돈덕전은 석조전보다 이른 1902~3년경에 지어진 건물인데 석조전과 지근 거리에 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을 재건하여 지어졌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눈에 보이는 형체보다 대한제국이 왜 세워졌으며 왜 그렇게 빨리 멸망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전시관, 교육관이 우리에게는 필요해 보인다. 건물과 집기는 껍데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