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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n 12. 2023

채무내용에 좇은 현실제공?

우리말이 무참히 무너져 있다

채권은 민법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민법의 제3편채권이고 물권과 함께 재산법의 주축을 이룬다. 채권채무관계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부딪치는 일이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과 채권채무관계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을 빌리는 것만이 채권채무가 아니고 다양한 채권채무관계를 맺고 해소하는 것을 계속하며 산다. 그만큼 채권은 중요하다.


채권자가 있으면 채무자가 있다. 민법은 채권이 소멸되는 이유로 변제, 공탁, 상계, 경개, 면제, 혼동을 들고 있는데 변제야말로 가장 일반적인 채권 소멸 사유다. 빚을 갚으면 채무가 소멸된다. 채권도 동시에 소멸된다. 그런데 이 간단한 이치를 민법은 대단히 어렵게 써 놓고 있다. 변제를 설명한 제460조를 보자.


제460조(변제제공의 방법) 변제는 채무내용에 좇은 현실제공으로 이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채권자가 미리 변제받기를 거절하거나 채무의 이행에 채권자의 행위를 요하는 경우에는 변제준비의 완료를 통지하고 그 수령을 최고하면 된다.


제460조는 변제는 '채무내용에 좇은 현실제공으로 이를 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처음 읽고서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조문의 취지는 채무 변제는 채무 내용에 따라 현실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다는 것은 실행한다는 것이니 더 짧게 말하면 변제는 채무 내용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채무가 100만원을 갚는 것이라면 100만원을 갚으면 변제하는 것이다. 채무 내용이 100만원인데 80만원만 갚는다면 변제가 아니다. 만일 채무가 누군가에게 결혼식장에 가서 축가를 불러 주는 것이라면 변제는 그 약속대로 결혼식장에 가서 축가를 불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결혼식장에 가서 일장 축사를 한다면 그 축사가 아무리 감동적고 멋지더라도 변제가 아니다. 채무 내용대로 실행하는 게 변제다. 


이 간단한 내용을 우리 민법은 '변제는 채무내용에 좇은 현실제공으로 이를 하여야 한다'고 해서 읽는 사람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현실제공이란 말도 낯설거니와 '채무내용 좇은'은 국어 문법에 어긋난다. '좇다'는 목적어가 필요한 타동사이므로 최소한 '채무내용 좇은'이라 해야 하고 그것보다 '채무내용에 따른'이라고 해야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좇은'이라는 말을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법무부가 제19대국회, 제20대국회에 제출했던 민법개정안에는 이 조문이 '변제는 채무내용에 따른 현실제공으로 해야 한다'라 돼 있다. '채무내용에 좇은'이 말이 안 되니 '채무내용에 따른'이라 고쳤고 '이를'은 군더더기이므로 뺐으며 '하여야'를 '해야'로 고쳤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변제는 채무내용대로 실행해야 한다'까지 이르진 못했다. 그마저도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아 개정안이 폐기되는 바람에 지금도 민법 제460조는 '변제는 채무내용에 좇은 현실제공으로 이를 하여야 한다.'이다. 우리말이 무참히 무너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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