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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l 11. 2023

생거진천 사거용인

진천을 찾아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은 오래됐다. 신라말의 고승 도선국사가 이미 했다고 하니 말이다.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 묻힌다는 이 말이 왜 생겼을까 생각해 본다. 추측컨대 용인은 온통 산이다 보니 농사 지을 땅이 많지 않은 데 반해 진천은 드넓은 평야 지대가 있어 곡물이 풍부히 생산되는 것과 관계 있지 않나 싶다. 과연 용인에는 예로부터 이름난 사람들이 많이 묻혔다. 고려말의 포은 정몽주도 그렇고 조선조의 조광조가 용인에 묻혀 있다.  


진천에 지인이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 방문했다. 낮엔 업무를 방해할 수 없이 일찌감치 도착해서는 진천 농다리를 방문했다. 농다리[籠橋]는 고려초에 만들어진 돌다리라니 역사가 여간 깊지 않다. 개천에 돌을 올려 놓아 사람이 돌을 밟고 건널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돌의 크기가 보통 아니다. 어디서 이렇게 큰 돌을 가져다 놓았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농다리 앞에 이르면 건너편 숲속에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는데 그 모습 또한 참으로 장관이었다.


농다리를 건너면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는데 산 아래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 초평호다. 산 정상의 미르전망대를 오르기 시작했는데 길이 얼마나 아기자기한지 힘든 줄을 모른다. 돌이 없이 흙뿐이라 걷기가 편하다. 미르전망대에 오르니 멀리 진천읍내가 보이고 바로 산 아래로는 중부고속도로 위로 차들이 맹렬히 달린다. 동쪽으로 산속에 초평호가 자리하고 있고...


잠시 틈을 내 방문한지라 구석구석 다니진 못했다. 진천초롱길을 다 둘러보려면 몇 시간은 걸리지 않을까 싶다. 호수 위에 걸쳐진 하늘다리도 건너고 호숫가로 난 평화로를 걸어보는 건 다음으로 미루었다. 근처엔 한반도 모양의 땅덩이가 호숫가에 있는데 초평로를 따라 산으로 오르면 그 지형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또 있다고 하는데 그 역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농다리와 그 주변을 간단히 둘러보고 지인의 공장을 찾아갔다. 진천군 이월면 신월리에 있었다. 거대한 공장 안에서는 작업자들이 분주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트럭이 들락거리니 문을 닫아 놓을 수 없고 찌는 삼복더위니 찬 바람이 나오는 기계가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작업자들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저녁을 지인과 같이 먹으면서 실태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외국인이 없다면 공장이 돌아갈 수 없다고...


진천읍의 거리에서 많은 외국인을 보았다. 이슬람권에서 온 듯한 여인은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지인의 공장에는 우즈베키스탄,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이 많다고 했다. 작업을 하는 데 필요한 한국어는 다들 충분히 잘한다고 했다. 개인차가 있기는 있어서 어떤 중국인은 도무지 한국말을 잘해 보려고 하는 생각이 없다고도 했지만...


진천이 특이한 것은 전국에서 매우 드물게도 인구가 늘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진천읍과 덕산읍이 있고 군 전체의 인구가 10만 가까이 된다 하니 시 승격 요건도 얼추 갖추었단다. 인구가 왜 늘까. 일자리가 많기 때문 아니겠는가. 과연 진천군에 참으로 많은 크고 작은 공장이 있었다. 진천 동쪽의 충북혁신도시는 진천군 덕산읍과 음성군 맹동면에 걸쳐 있기도 하다.


1박 2일 진천에 머물다 오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외국인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한국사회가 됐다. 그런데 그 외국인은 대부분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영주권이 없다. 대개 3년까지 체류할 수 있다는데 3년을 넘기고 불법체류하는 이들도 많다 했다. 합법 체류든 불법 체류든 결국은 돌아가야 할 이들... 이런 외국인들 없인 이 나라가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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