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Jul 12. 2023

점유의 태양

이제는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민법은 국민 생활의 기본법이라 일컬어진다. 수많은 법률 가운데서 단연 으뜸을 차지하는 법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제1조부터 제1118조까지 있으니 방대하다. 1958년 2월 22일에 제정, 공포된 민법은 당시에는 국한 혼용으로 씌었다. 한자어는 한자로 적혔다. 그리고 6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자는 그대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터넷으로 법령을 검색하거나 스마트폰으로 법령을 검색하면 민법에서 한자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모두 한글로 적혀 있다는 것이다. 법을 개정하지 않은 채 임의로 한자를 한글로 바꾼 것이다. 왜 법을 개정하지 않고 이렇게 한글로 바꾸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짐작은 간다. 법 개정 절차가 매우 번거로우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법 개정은 번거롭고 그렇다고 한자를 그대로 보이자니 한자를 읽을 줄 아는 국민이 별로 없어서 스리슬쩍 한자를 한글로 바꾸었을 것이다.


만일 한글로 바꾸지 않고 제정될 때 그대로 한자로 보였으면 어땠을까. 당장 아우성이 빗발쳤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읽으라고 한자를 썼느냐고 항의가 여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적법한 절차를 생략하고 한글로 바꾼 것은 잘한 일이었나? 법제처는 법 개정을 하자고 국회를 설득할 자신이 그렇게 없었나? 아니, 국회 스스로가 한자투성이인 민법을 개정하려고 했어야 하지 않나? 딱한 노릇이다.


그런데 더욱 고약한 일이 있다. 한자를 슬그머니 한글로 바꾸다 보니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한 예로 민법 제197조를 보자.


제197조(점유의 태양

①점유자는 소유의 의사로 선의, 평온 및 공연하게 점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②선의의 점유자라도 본권에 관한 소에 패소한 때에는 그 소가 제기된 때로부터 악의의 점유자로 본다.


제197조의 제목이 점유의 태양이다. 점유의 태양?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일반인이야 민법을 읽을 일이 거의 없을 테니 아예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법을 늘 사용하는 법조인들은 점유의 태양을 어떻게 이해할까? 태양이 뭔지 알까?


민법이 제정될 때 제197조의 제목은 占有의 態樣이었지 점유의 태양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자를 한글로 바꾸고 보니 점유의 태양이 되었다. 그런데 태양에서 態樣을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설령 態樣을 떠올린다 한들 態樣이 무슨 뜻인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占有의 態樣은 1950년대에 민법이 제정될 때 쓰인 말이다. 그리고 아마 틀림없이 일본 민법 제186조의 제목인 占有の態様等に関する推定에서 따온 말일 게다. 요컨대 태양(態樣)은 국어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일본어 단어다. 그런데 한자 態樣이라면 뜻이라도 짐작해볼 수 있지 한글로 태양이라고 하니 무슨 뜻인지 감을 잡을 수도 없다. 법무부가 2015년과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국회에 제출했던 민법개정안에는 점유의 태양(態樣)이 점유의 모습으로 알기 쉽게 바뀌었지만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지 않는 바람에 지금도 민법 제197조의 제목은 점유의 태양이다. 이제는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매거진의 이전글 생거진천 사거용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