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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l 12. 2023

시기? 동전?

무작정 한글로 바꾸니 벌어진 일

인터넷으로 법령정보를 찾든 스마트폰 앱으로 법령정보를 찾든 법률 조문은 다 한글로 제공된다. 참 편리하다. 그런데 요즘 만들어진 법률은 만들어질 때부터 한글로 적혀 있지만 오래된 법률은 제정될 때 새카맣게 한자로 표기되었다. 헌법, 민법, 상법, 형법이 다 그렇다.


그런데 법령정보센터에서는 이들 법률의 한자도 한글로 바꾸어 보여준다. 그 결과 우스꽝스런 모습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점유의 태양은 그런 예다. 민법 第197條(占有의 態樣)제197조(점유의 태양)으로 바꾸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은 것이다. 한자를 한글로 바꾸는 바람에 뜻을 바로 알아챌 수 없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다음은 민법 제600조다.


제600조(이자계산의 시기) 이자있는 소비대차는 차주가 목적물의 인도를 받은 때로부터 이자를 계산하여야 하며 차주가 그 책임있는 사유로 수령을 지체할 때에는 대주가 이행을 제공한 때로부터 이자를 계산하여야 한다.


제600조의 제목이 '이자 계산의 시기'이다. 여기서 '시기'가 무엇일까. 누구나 '어떤 일이나 현상이 진행되는 시점'을 뜻하는 시기(時期)를 떠올리겠지만 그게 아니다. 제600조 제목의 시기始期로 '법률 행위의 효력이 발생하거나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는 기한'이라는 뜻이다. 한자로 씌었다면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한글로 바꾸어 버리니 始期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런데 불과 두 조 뒤인 제603조에 '시기'라는 말이 또 나온다.


제603조(반환시기) ①차주는 약정시기에 차용물과 같은 종류, 품질 및 수량의 물건을 반환하여야 한다.


이때의 시기는 그야말로 '어떤 일이나 현상이 진행되는 시점'을 뜻하는 시기(時期)이다. 제600조의 시기와 제603조의 시기는 한글만 같을 뿐 한자가 다른, 뜻이 전혀 다른 말이다. 그러나 한글로 적어 놓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시기라는 말을 한자로 적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대책 없이 한글로 바꾼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아가 시기(始期)를 '시작 시점' 같은 말로 풀어 주는 민법 개정을 했어야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자를 한글로 적는 바람에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예가 또 있다.


제377조(외화채권)

①채권의 목적이 다른 나라 통화로 지급할 것인 경우에는 채무자는 자기가 선택한 그 나라의 각 종류의 통화로 변제할 수 있다. (이하 생략)


 제378조(동전) 채권액이 다른 나라 통화로 지정된 때에는 채무자는 지급할 때에 있어서의 이행지의 환금시가에 의하여 우리나라 통화로 변제할 수 있다.


제378조의 제목은 동전이다. 동전이 무슨 뜻인가? 아는 사람만 안다. 원래 민법에 同前이라 씌어 있었던 것으로서 바로 앞 조인 제377조의 제목과 같다는 뜻이다. 흔히 '전과 동(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전 같은 말을 쓸 게 아니라 앞 조의 제목인 '외화채권'을 한 번 더 써 주면 알기 쉽지 않겠는가. 同前을 기계적으로 한글로 바꾸는 바람에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일으킨다.


이상과 같은 법률 조문의 난맥상과 난해함은 법률 개정을 통해서만 바로잡을 수 있다. 그 일을 미뤄두고 있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법무부가 2015년과 2018년에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을 말끔히 해소한 민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국회가 이를 처리하지 않고 폐기시키고 말아서 위에서 논한 문제점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도대체 국회는 뭘 하는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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