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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l 16. 2023

KBS영상실록

1945년

우연히 유튜브에서 KBS영상실록을 알게 됐다. 1995년에 광복 50주년을 맞아 KBS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였고 그 첫 회가 1945년 편이었다. 20분 남짓한 그 영상을 보면서 그동안 품고 있었던 그 시절에 대한 궁금증을 꽤나 씻어냈다. 얼마나 후련한지 모른다. 그 짧은 영상물로 얼마나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을까마는 이런 걸 보지 못했던 때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다. 참으로 고마운 영상이었다.


새로 알게 된 것이 많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지만 일본이 바로 물러간 게 아니고 9월 9일 서울에 미군이 들어왔을 때까지는 여전히 일본군과 경찰이 이 땅을 지배하고 다스렸다는 게 놀라웠다. 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 영상을 보지 않았을 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우선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한 것 자체를 우리나라 사람들 중 안 사람이 몇 안 됐단다.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라디오로 들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라디오가 집집마다 있었던 게 아니었을 테니 그럴 만하다.


전에 들은 이야긴데 당시 라디오의 음질이라는 것이 하도 나빠서 천황의 항복 선언을 들은 사람들도 도대체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했다는 입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이튿날인 8월 16일에는 깜짝 놀랄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거리로 뛰어나왔다고 한다. 감격을 가누지 못해 거리로 뛰쳐 나오긴 했는데 태극기를 든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도대체 태극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나. 급한 김에 들고 나온 건 일장기거나 일장기 위에 급히 덧칠해서 태극기 흉내를 낸 깃발이었다. 일본이 좋아서 일장기를 들고 나온 게 아니고 가진 게 일장기뿐이어서였을 것이다. 영상은 어느 시골 가정에서 가장이 자녀를 곁에 두고 천에다 사발을 올려 놓고 태극기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일본인들은 바로 물러가지 않았다. 여전히 이 땅에 남아 지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이 땅에서 물러간 것은 9월 10일부터였다고 한다. 9월 8일 미군이 배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했다. 미군은 9월 9일 서울에 들어왔다. 그 날 오후 4시 30분 중앙청 앞 광장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대신에 성조가가 게양됐다. 그러니까 일본이 실제로 물러간 것은 1945년 9월 10일부터였던 것이다. 그날 중앙청에서 조선총독부를 접수한 미군이 광장에 새카맣게 친 천막촌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한국 땅에 들어왔으니 미군 병력이 묵을 데가 없었던 것이다. 미군은 그렇게 서울에 들어온 첫날 밤을 중앙청 앞 천막 캠프에서 보냈다. 아마 상당 기간 그랬을 것이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에는 일본군 막사로 옮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게 용산 미군기지 아니었겠나.


동영상에서 아주 인상깊었던 장면이 일본군의 모습이었다. 9월 9일 서울에 미군이 들어올 때 일본군은 경비를 자청했다 한다. 말 탄 일본 경찰이 여전히 식민지 지배국 경찰인 양 환영 나온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압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발포까지 해서 죽은 사람마저 있었다고 내레이션은 전했다. 그런 일본군이었지만 바로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에 들어갔고 그들이 가진 포, 총, 탱크, 비행기는 모두 미군에 양도됐다. 그리고 총, 포 등은 바다에 버려졌고 탱크, 비행기는 폭파됐다. 그렇게 일본군은 무장해제됐다. 부산에서 일본으로 쫓겨가는 배를 타기 전 일본군은 미군의 혹독한 검열을 받아야 했다. 반출 금지 품목은 없는지 검사하는 미군 앞에서 고양이 앞 쥐마냥 양순하게 시키는 대로 옷과 신을 벗어 보였다. 비참한 패전국 군대의 모습이었다. 약한 자엔 강하고 강한 자엔 약한 게 일본인이라더니...


이 동영상에서 또 깜짝 놀란 것은 내레이션에서 '광복 직전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은 여운형은...'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왜 패망 직전 몽양 여운형에게 행정권을 이양했을까. 아니 그보다 그것은 사실이었을까. 아무튼 여운형은 즉각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에 지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9월 9일 서울에 들어온 미군정은 몽양이 세운 건준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할 리 없었을 것이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9월초 평양에 들어와 10월에 평양시민환영대회에 얼굴을 드러냈고 남쪽에서는 이승만이 귀국해 국민에게 방송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 인사들과 함께 11월 하순에 귀국했다. 미군정은 이들의 귀국을 몹씨 꺼려서 개인 자격 입국이라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지사들은 귀국했지만 조국은 미군이 통치하고 있었다. 독립은 아득해 보였다. 더구나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 사항이 날아들었다. 한국을 4개국이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었다. 독립의 꿈에 부풀어 있던 국민들에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고 1945년 연말 반탁 시위가 뜨겁게 불붙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12월 30일 고하 송진우가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광복은 되었으나 나라의 운명은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KBS 영상실록 1945년 [영상실록] KBS 1995.7.31 방송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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