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보다 못한 게 뭔가
코로나 때문에 연기되었던 제9회 응씨배세계바둑선수권대회가 끝났다. 결승 3번기에서 한국의 신진서 9단이 중국의 셰커 9단을 2:0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한국이 여섯 번 우승하고 중국이 세 번 우승했다. 신진서 9단은 최근의 몇 차례 세계 대회에서 부진했던 것을 털어내고 세계에서 가장 상금이 큰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명실공히 세계 바둑 1인자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이에 반해 셰커 9단은 중국에서 열리고 중국인이 개최한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그가 우승하기를 바랐던 수많은 중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실력 차이를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필자는 결승전을 관전하면서 묘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결승전 바둑 내용보다는 이 대회 자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고 중국과 한국의 차이를 비교해 보게 되었다. 응씨배세계바둑선수권대회는 잉창치배 또는 응씨배라고도 한다. 이 대회를 만든 이가 중국인 잉창치(應昌期)(1917~1997) 씨여서다. 그는 중국 저장성 닝보시 출신이지만 대만에서 활동했다. 본토 출신이지만 대만사람이 된 것이다. 잉창치 씨는 금융인으로서 대만에서 큰 부를 쌓았고 활발히 기업 활동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바둑을 좋아했고 기력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결국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1988년 세계바둑선수권대회를 창설했다. 그 첫 대회의 결승전 상대는 중국의 녜웨이핑 9단과 한국의 조훈현 9단이었다. 당시 녜웨이핑 9단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바둑 강국 일본의 고수를 모조리 거꾸려뜨렸다. 응씨배 결승전에서 녜웨이핑 9단과 조훈현 9단은 세계적 주목을 받는 대결을 펼쳤고 조훈현 9단이 3:2로 역전승함으로써 첫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로도 4회 대회까지 한국 기사들이 모두 우승을 차지했으니 중국 기사가 우승해 중화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떨치기를 간절히 바랐을 잉창치 씨의 소원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 대회 전 여덟 번의 응씨배 대회에서 한국이 다섯 번 우승했고 중국이 세 번 우승했다. 최근의 두 번은 모두 중국이 우승했다. 이번에 신진서 9단이 우승함으로써 한국이 다시 우승컵을 가져 왔다. 상하이 한복판에서 신진서 9단은 조국 대한민국에 낭보를 안겨 주었다. 14억 인구 중국을 5천만 인구의 한국이 이겼다. 단순히 사람이 많다고 바둑이 센 것은 아님을 증명했다.
그런데 이번 결승전이 이루어진 장소는 어딘가. 중국 상하이 시내에 있는 쑨커별장(孫科別墅)으로 중국의 국부 쑨원의 아들 쑨커가 살던 집이라 한다. 유서 깊은 곳이다. 필자의 관심은 쑨커별장이 아니라 대만과 중국의 관계다. 지금 중국의 대만 침공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올 만큼 '양안' 관계가 험악하다. 하지만 대만의 실업가가 창설한 세계바둑대회가 중국 본토에서 열렸고 중국의 기라성 같은 기사들이 참가했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기사들도 참가했지만 말이다. 코로나로 대면 대국이 불가능해져 연기되었다가 드디어 상하이에서 대면 결승전이 성사되었다. 이 대회가 열리는 가운데 대만과 중국의 군사적, 정치적 대립과 갈등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만 사람이 창설한 대회건만 중국 심장부에서 결승전이 치러졌다. 군사적으로는 일촉즉발이지만 반대로 바둑에서는 그런 일이 있느냐는 듯한 분위기 아닌가.
우리도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활발하게 활동할 때는 비슷했다. 정주영 회장은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지금도 평양 시내에는 정주영체육관이 있다. 그가 거액을 희사해 지었을 것이다. 정 회장은 1,001마리 소떼를 이끌고 방북하기도 했다. 남북의 군사적 긴장, 대결과 아랑곳없이 기업인의 활동은 자유자재였다. 정주영 회장이 타계한 지도 22년이나 지났다. 이젠 남북의 경제 협력도 끊어졌다. 개성공단도 문을 닫았고 금강산 관광도 멈춘 지 오래다. 상하이에서 펼쳐진 응씨배 결승전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이 떠올랐다. 바둑 실력은 중국보다 한 수 위지만 민족 화해와 교류 면에서는 그만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