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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Oct 27. 2023

금동관음보살좌상

외규장각 책들과는 어떻게 다를까

고교 동창들과 점심을 같이하게 됐는데 한 친구가 대법원이 일본에서 절도범들이 훔쳐온 불상의 소유권은 일본의 절에 있다는 판결을 내린 데 대해 격하게 비판했다. 듣고서 맞장구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반박할 논리도 갖고 있지 못했다. 하기야 법관들조차도 1심의 판단과 2심, 3심의 판단이 다르지 않았나. 불상의 소유권이 일본의 절에 있느냐 서산 부석사에 있느냐는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사실관계부터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주장은 의미가 없으니까. 우선 이 불상은 언제, 누가, 어디서 만든 걸까.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이 불상에 관해 남아 있는 기록이다. 그런데 불상에 관한 기록이 있단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결연문'이라는 게 있고 그 결연문에 따르면 "1330년경 서주(서산의 옛 지명)에 있는 사찰에 봉안키 위해 제작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의문이 꼬리를 문다. '결연문'이라는 말부터가 국어사전에 없다. '결연문'이란 무슨 뜻일까. 이 결연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결연문에 언급된 불상이 과연 절도범들이 일본의 절에서 훔쳐온 불상에 관한 언급일까.


이런 게 궁금하기 짝이 없었는데 다행히 <나무위키>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었다. 1950년대에 일본의 관음사에서 불상을 청소하다가 복장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1330년 2월에 32명이 시주해 이 불상을 서주(서산)의 부석사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었다는 것이다. 복장물(腹藏物)은 다행히 국어사전(우리말샘)에 올라 있는데 "불상을 만들 때, 그 가슴에 넣는 물건. 금ㆍ은ㆍ칠보(七寶)와 같은 보화(寶貨)나 서책(書冊) 따위가 있다."라 뜻풀이되어 있다. 불상의 가슴에 그런 기록이 담겨 있다니 놀랍다.


그러나 의문은 계속된다. 1330년경 고려시대 충청도 서주(지금의 서산)의 절에 봉안된 불상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걸까. 왜구가 빼앗아 갔다는 건 그저 막연한 가설일 뿐일 게다. 부석사에서 일본으로 선물을 보냈을 리는 없을 테고 왜구가 빼앗가 간 게 개연성이 다분히 높지만 그저 개연성일 뿐 아니겠는가. 그게 15세기였을까, 16세기였을까, 그 이후였을까. 그 누구도 답하지 못할 게다.


어쨌든 일본으로 건너간 불상은 바로 쓰시마섬의 관음사(観音寺)로 갔는지 그렇지 않고 일본에서도 여러 곳을 떠돌다가 관음사에 정착했는지도 알 수 없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관음사라는 일본의 자그만 절은 1953년에 법인화가 되었는데 그때 이미 이 불상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초로 언제부터 관음사가 이 불상을 갖고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수백 년 됐을지 모른다.


사건은 2012년 10월에 발생한다. 일본 쓰시마섬에 가서 불상을 훔쳐 오리라 작당한 한국인 일행은 10월 3일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쓰시마섬에 도착한다. 그리고 10월 6일 범행했다. 세 곳에서 세 점의 불상을 훔쳤다. 그리고 이 불상들을 쓰시마섬에서 후쿠오카로 가져간다. 배를 타고 갔을 것이다. 10월 8일 후쿠오카항에서 다시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당장 부산항 세관에서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세관이 엉뚱한 결정을 내린다. 절도범들이 가지고 온 불상을 진품이 아닌 가짜라고 판단하고 통관을 시켜 줬단다. 진품인 문화재라면 문화재 관련 법령에 따라 당연히 통관되지 못했을 것이다. 세관에는 문화재 감정을 하는 전문가들이 있는데 그들은 왜 그런 엉뚱한 결정을 내렸을까. 어쨌든 절도범들은 무사히(?) 쓰시마섬에서 훔쳐온 귀중한 불상들을 국내에 반입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절도범들은 어떻게 해서 쓰시마섬의 몇 절에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불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까. 원래 우리나라 것이었는데 일본 왜구들이 훔쳐갔으니 정당하게 되찾아온다는 애국적인 의식을 갖고 훔쳐 왔을까. 아니면 그저 돈 벌겠다는 욕심으로 훔쳐 왔을까. 알 수 없다.


절도범들은 훔친 불상을 국내에 들여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불과 두 달만에 범행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주범을 비롯한 몇 명이 경찰에 붙잡혔고 공범들은 수배됐다. 당연히 훔친 불상은 압수됐다. 절도범들은 형사재판에 넘겨졌고 훔친 불상은 국가에 몰수됐다. 몰수된 불상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보관했다. 이때부터 서산 부석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원 소유주는 부석사이므로 부석사에 돌려달라는 소송을 낸 것이다. 그러나 도난당한 일본의 관음사가 가만 있지 않았다. 자기들이 도난당한 것이므로 돌려달라 요구했다. 주한일본대사관도 나섰을 것이다.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됐다.


1심인 대전지법은 소유권이 서산 부석사에 있다고 판결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한국 검찰이 즉각 항소했다. 불상의 소유권이 일본 관음사에 있다고 봤으니 항소하지 않았겠나. 왜 검찰은 일본 관음사 편을 들었을까. 어떻든 2심인 대전고법은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일본 관음사가 소유권이 있는 게 맞다고 판결했다. 적어도 1953년부터 그 절이 2012년 10월 6일 도난당할 때까지 거의 60년을 점유했으니 소유권이 일본 관음사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엊그제 한국의 대법원은 2심 판결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로써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소유권 문제는 확정됐다. 곧 일본으로 반환하는 절차가 시작될 것이다.


여기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화도의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297권의 책이 145년만인 2011년에 한국에 돌아온 일을 떠올리게 된다. 비록 반환이 아니라 영구임대의 형식이긴 했지만 어쨌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외규장각 책과 서산 부석사 불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대법원 판결에 따라 불상을 일본 관음사에 돌려주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씁쓸한 맛이 남는다.


그런데 이번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한 신문의 다음과 같은 보도가 눈길을 끈다.


서산부석사불상봉안위원회 이상근 상임대표는 “2016년 (반환) 소송을 제기한 뒤 많은 국민이 불상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응원해주신 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이번 소송은 단순히 불상을 찾는 재판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재판 결과에 관계없이 일본(관음사)과의 교류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관음사와의 교류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교류란 무엇을 뜻하나. 최초의 소유주(부석사)와 현 소유주(관음사) 사이에 앞으로 어떤 교류가  있게 될까. 무슨 교류를 할까. 자못 궁금하다.


금동관음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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