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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Oct 24. 2023

국회도서관에 가다

보물을 발견하다

대한민국은 1945년 일제 압제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광복을 맞았다. 3년 뒤인 1948년에는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수립했으며 유엔으로부터 승인도 받았다. 당당한 자주 독립국가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 사실 나도 이를 안 게 오래지 않다. 그게 뭔가. 당당한 주권국가가 되었지만 1950년대 말까지도 대한민국은 일본 민법을 썼다는 사실이다. 나라의 뼈대인 헌법만 1948년에 만들었지 온갖 복잡다단한 생활관계를 규율하는 민법, 상법은 1950년대까지도 일본의 법을 썼다. 우리의 민법, 상법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법을 갖기 위한 노력은 1948년부터 시작되긴 했다. 그러나 6.25를 만나 법전 편찬 작업은 늦춰졌고 정부는 1953년에서야 민법 제정안을 마련하고 1954년에 국회에 제출했다. 제출된 민법안을 놓고 국회가 심의하는 데 또 3년이 걸렸다. 1957년 12월에야 비로소 국회에서 민법제정안이 통과됐고 1958년 2월 22일에 대통령이 공포했다. 그러나 시행일은 1960년 1월 1일부터였다. 결국 195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일본 민법을 썼던 것이다.


그동안 늘 궁금했다. 1950년대에도 숱하게 재판했을 텐데 재판할 때 판사들은 어떤 법전을 썼는지가... 우리 민법은 없었고 일본의 민법을 썼다는데 그걸 의용(依用)민법이라 불렀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의용민법은 일본어로 된 일본민법 그 자체였다는 건가, 그게 아니고 일본민법을 우리말로 번역한 한국어판이었다는 건가. 우리말로 번역된 법을 썼다면 그건 언제, 누가 번역한 것일까 등등이 여간 궁금하지 않았는데 오늘 그 의문을 국회도서관에 가서 어지간히 풀었다.


그걸 쉽게 찾은 건 아니었다. 서가에는 현행 법령집밖에 꽂혀 있지 않았다. 2023년 현재의 우리나라 법령집은 방대했고 68권에 나뉘어 편철이 되어 있었다. 1950년대의 법령집은 서가에서 찾아지지 않았다. 사서에게 다가가 195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사용했던 구민법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컴퓨터에서 검색을 해보라고 권했다. '의용민법', '구민법' 등을 넣고 검색해 보았으나 관련 논문들만 잔뜩 나왔을 뿐 정작 법전 자체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사서에게 가서 내가 찾는 것은 1950년대 당시의 법조문 자체임을 말했더니 알겠다고 했다. 한참 후에 그에게 다가가니 그가 자그만 낡은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1959년 2월에 발간된 우리나라 법전이었다. 과연 거기에 1959년 당시의 우리나라 법령이 수록돼 있었고 민법도 당연히 포함돼 있었다.


민법은 제목이 舊民法이라 돼 있었다. 무려 단기 4229년에 제정된 법이었다. 그렇다. 단기 4299년은 서기 1896년이고 그해에 일본민법이 제정되었는데 그때의 일본민법이 한국어로 번역돼 수록되어 있었다. 그걸 처음 보는 순간 떨렸다. 말로만 1950년대까지도 우리가 일본민법을 '의용'하고 있었다고 들었지 눈으로 그 실체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민법도 1896년 제정 이후로 몇 차례 개정된 걸로 아는데 1959년에 발간된 우리나라 법전에 1896년의 일본민법이 舊民法이란 이름으로 한국어로 번역돼 수록돼 있다니!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인들은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패전 선언 이후 속속 일본으로 떠나갔지만 이 땅의 질서와 규범은 일본의 것이 계속해서 지배했고 그것을 우리것으로 바꾸는 데는 십수 년이 걸렸다. 1960년 1월 1일부터 우리 민법이 시행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우리 민법조차도  태반이 일본민법을 번역하다시피했다는 사실이다. 2023년 지금 쓰고 있는 민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1950년대에 우리 민법을 만든다고 법학자들이 머리 싸매고 연구하고 국회에서 치열하게 심의했지만 결국 민법제정안의 토대는 일본민법이었다. 물론 일본민법뿐 아니라 독일민법, 프랑스민법, 스위스민법, 영국민법, 중국민법, 만주국민법까지도 참고해서 민법을 만들었다지만 일본민법이 기초가 된 것만은 부인키 어렵다.(만주국민법은 사실상 일본민법이다. 만주국 자체가 일본이 세운 괴뢰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민법을 참고해서 만든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일본민법도 역시 독일민법, 프랑스민법을 참고해서 제정되었지 않나. 그런데 일본어 번역을 엉터리로 한 조문이 지금껏 남아 있다는 것은 여간 분노가 끓어오르게 하지 않는다. 현행 우리 민법 제2조제1항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는 정상적인 국어인가. 일본민법 조문 "権利の行使及び義務の履行は、信義に従い誠実に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를 엉터리로 번역한 거 아닌가. '신의에 좇아'가 정상적인 한국어인가. '신의를 지켜'나 '신의에 따라'라야 제대로 된 한국어 아닌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난 피가 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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