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
우리나라는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국어학도 상당히 활발하다. 명망 있는 국어학자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국어학계에 묘한 풍토가 있다. 국어학자들의 연구 대상에 세상의 국어, 국민 생활 속의 국어가 별로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국어학자들은 세상 속의 국어가 아닌, 세상과 유리된 국어를 대상으로 삼고 이론을 세우고 설명했다. 국어 문법학, 통사론, 의미론 논문에 나오는 숱한 예문은 보통 국어학자가 머리에서 짜낸 예문이지, 실생활에 쓰이고 있는 예문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국어학계가 얼마나 현실 언어에 무관심했는지에 대한 증거로 나는 주저 없이 우리나라 민법 제77조 제2항을 든다. 민법 제77조는 다음과 같다.
제2항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문이다. 문법에 맞지 않고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이다. 그런 비문이 1958년에 제정될 때 들어갔는데 지난 65년 동안 고쳐지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다. 민법은 기본법 중에서도 기본법으로 온 국민의 생활을 규율하는 법인데 이런 중요한 법에 말이 안 되는 문장이 들어 있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렇다면 국어학계는 지난 세월 뭘 했단 말인가. 마땅히 말이 되는 문장으로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야 하지 않나. 세상 일에 담 쌓고 살아온 국어학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런 국어학계였지만 현실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활동한 국어학자가 없지 않았다. 어제 교보에 가서 한 국어학자가 쓴 책을 서가에서 꺼내 읽어보았다. 국어순화를 위해 평생 헌신했고 법률문장 순화에도 진력한 분인데 책의 한 대목을 읽고 깜짝 놀랐다. "현행 육법은 헌법이 1987년, 형법이 1953년, 형사소송법이 1954년, 민법이 1958년, 상법이 1962년, 민사소송법이 2002년에 만들어졌다."고 씌어 있었다. 화들짝 놀랐다. 민사소송법이 2002년에 만들어졌다고? 민사소송법은 1960년에 만들어졌다. 42년만인 2002년에 개정되었을 뿐이다. 이분이 국어순화와 법률문장 순화를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것은 틀림없지만 법률 분야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음을 고스란히 보였다. 법조계 사람들이 이런 대목을 읽고 어찌 생각했을까 아찔하다. 헌법도 1987년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헌법은 그해에 개정되었을 뿐이고 1948년에 제정되었음은 웬만한 국민이면 안다.
국어학계가 너무 세상 일에 대해 무심하다. 대부분의 국어학자들은 법의 언어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고 일부 관심 있는 국어학자도 위에서 보듯 법에 대해 잘 모른다. 안타깝다. 대한민국의 법언어, 이대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