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 고든은 없다
SBS답지 않은 실수가 있었다
예전부터 SBS 방송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 프로그램을 매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만든다고 말이다. 한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거의 20년쯤 전인데 어떤 SBS 프로에서는 '자장면'과 '짜장면'을 다루었다. 왜 사람들은 '짜장면'이라고 하는데 국립국어원에서는 '자장면'을 쓰라고 하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해서 방영했다. 거기서 나는 국어원측 입장에서 왜 '자장면'인지를 설명하는 악역(?)을 맡은 적이 있다. 그 프로를 보면서 이런 프로그램 하나 만드는데도 이토록 깊이 있게 파고드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 프로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결국 후에 국어사전은 '자장면'과 함께 '짜장면'을 인정했다. 화끈하게 '자장면'을 버리고 '짜장면'만 인정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자장면', '짜장면' 둘 다 맞다고 한 건 영 아쉽지만 어쨌든 '짜장면'은 틀린 말에서 바른 말로 승격했다.
그런데 어젯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면서 SBS답지 않은 실수를 발견하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보통 사람보다 지리에 예민한 편이다. 지리 정보가 내겐 매우 중요하다. '밸런타인데이의 악몽-조지아주 한인 여성 살인사건'을 보다가 이런 설명을 접했다. 20대 한인 여성의 시신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곳은 포트 스튜어트와 포트 고든 사이의 25번 고속도로상 밀렌에서였다고 하는 설명이 지도와 함께 제시됐다. 포트 스튜어트도 미군의 거대한 기지이고 포트 고든도 마찬가지다. 두 군 기지를 잇는 고속도로변 어딘가에 시신이 유기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범인이 군부대와 관계 있음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부대 사이에는 이동이 빈번할 수밖에 없고 범인은 군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프로그램이 언급한 두 남자는 김정은 씨가 1988년 당시 함께 살고 있던 마이클과 조(호세)였는데 그중 조(호세)가 포트 스튜어트에서 근무하는 군인이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조가 범인일지 모른다고 하지는 않았다.
포트 고든에 대해 알고자 구글 지도에서 찾아보았다. 어디 있는 부대인지. 그러나 포트 고든은 없었다. 2023년 10월 27일 조지아주 오거스타 부근 군부대 연병장 바턴 필드에서는 상당히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기지 이름을 포트 고든에서 포트 아이젠하워로 바꾸는 행사였다. 그날로 포트 고든에서 포트 아이젠하워로 명칭이 변경됐다. 고든은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 때 남부군의 장군이었다. 그는 리 장군 휘하에서 싸웠으나 패배했다고 한다. 그는 퇴역 후 미국 연방 상원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아이젠하워는 누구인가. 잘 알려진 것처럼 제34대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다. 지명도로 볼 때 고든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든 포트 고든을 포트 아이젠하워로 바꾸는 명명식 행사가 2023년 10월 27일에 열렸다. <밸런타인데이의 악몽-조지아주 한인 여성 살인사건>은 2023년 12월 9일 방송되었다. 물론 제작은 그 전에 됐을 것이다. 언제 제작되었을까. 10월 27일 전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포트 고든'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12월 9일 그 프로를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다. 지금 포트 고든은 없고 포트 아이젠하워가 있을 뿐이니까.
어쨌거나 그런 건 사소한지도 모른다. 1961년 미군 부대가 있는 평택에서 태어난 김정은 씨. 1980년대초 평택의 미군 부대에 근무하던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결혼 생활이 평탄치 못해 몇 년만에 이혼했다. 그리고 동거하게 된 남자가 하인스빌 부근의 포트 스튜어트에 근무하던 군인이었다. 그 남자는 그녀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어 버려진 후 종적을 감추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군대는 필요하고 있을 수밖에 없지만 군대에 얽힌 개인의 삶은 기구할 수 있다.
이제 Fort Gordon은 없다. Fort Eisenhower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