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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Dec 13. 2023

어문규범에 대한 단상

'회계연도'와 '순댓국'을 생각하며

한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정기 등산 모임의 회칙을 우연히 보게 됐다. 그들은 197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닌 이들이다. 이미 60대 중반... 참 열심히도 등산을 다닌다. 한 달에 한 번은 꼭꼭... 이미 동기생들 중에 세상 떠난 이들도 꽤 있지만 등산 모임 사람들만은 씩씩하고 활력이 넘친다. 보기 좋다.


그런데 회칙을 읽어 나가면서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칙이라면 제법 정성껏 썼음직한데 띄어쓰기며 구두점은 말할 것도 없고 '-로서'와 '-로써'를 제대로 구별해서 쓰지 않고 있질 않나 '年 1回'를 '연 1회'라 하지 않고 '년 1회'라 썼다. '會計年度'는 '회계연도'라 하지 않고 '회계년도'라 쓰고. 우리 국민의 평균적인 국어 지식과 국어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회계년도'를 보면서 순간 헷갈렸다. '회계연도'가 맞나 '회계년도'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평소 '회계연도'가 맞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 모임 회칙에서 '회계년도'라 쓰인 걸 보니 '회계년도'가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계년도'가 틀렸다는 느낌이 바로 확 들지 않고 말이다. 이건 뭘 뜻하는가? 비록 어문규범에 따르면 '회계연도'가 맞지만 '회계년도'라고 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겠다는 뜻 아닐까 싶었던 거다.


점심에는 바로 그 학교 출신 한 사람을 만나 밥을 먹게 되었다. 내가 국어 분야에 오래 종사했다는 걸 아는 그가 잘 만났다는 듯이 내게 따져 물었다. '상일동'은 왜 발음이 [상일]이고 '벽돌담'은 왜 발음이 [벽똘]이 아닌 [벽똘]이냐는 것이었다. 순간 뜨끔했다. 일반인들은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싶었다. 된소리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무슨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게 아니다. 왜 '김밥'은 발음이 [김]이지만([김]이라 발음하는 사람도 있긴 있다!), '콩밥'은 발음이 [콩]이 아니고 [콩]인지 누가 설명할 수 있겠나. 그런데도 그 친구는 그럼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때 발음을 단어마다 일일이 따로 따로 외워야 하지 않냐며 국어가 어렵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그가 왜 외국어는 규칙이 정연한데 우리말은 규칙이 없느냐고 따지듯 물었는데 나는 우리말만 그런 게 아니라 외국어도 역시 규칙적이지 않은 경우가 숱하게 많다고 답했다. 왜 영어에서 go-ed가 아니고 went인가. 외워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한국어만 말이 불규칙적이고 외국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오해일 뿐이다. 언어란 숱한 불규칙 덩어리다.


그런데 그가 또 따지듯 물었다. '순대국'이 맞는지 '순댓국'이 맞는지를. 그래서 '순댓국'이 맞다고 답하면서 그러나 그렇게 정해 놓은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의견의 차이를 해소할 수 있었다. 나아가 어문당국이 왜 '순댓국'을 고집하는지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해주었다. 이제껏 '순댓국'을 쓰라고 해왔는데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서 '순대국'이 맞다고 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말이다. 


'회계'와 '회계'는 어느 것 하나만 맞다고 할 까닭이 뚜렷해 보이지 않는다. 둘 다 써도 좋다고 할 수 없으니까 '회계연도'로 몰아준 것이지 처음부터 '회계년도'가 맞다고 했다면 문제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 ''은 다르다. ''이 맞다고 한 것부터가 무지막지한 횡포였다. 멀쩡하게 '순대국'이라 쓰던 사람을 바보, 무식쟁이로 만들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국민은 바보, 무식쟁이가 돼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왜 멀쩡한 사람들을 바보, 무식쟁이로 만드나. 도대체 누가 바보, 무식쟁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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