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의 눈높이를 생각해 달라
최근 서울 도봉구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두 30대 남자가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이를 보도한 한 신문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둔력'에 의한 손상이란다. '둔력'이 뭐지 싶어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으나 그런 말은 없었다. 다만 네이버 어학사전에는 <이우주 의학사전>에 '둔한 힘'이라 뜻풀이되어 있다고 나와 있었다. 의학 용어인가 보다. 도대체 이런 말은 신문 기사에 나옴직한 말인가? 나만 모르고 딴 사람들은 다 아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 친구에게 이 얘길 했더니 당최 모르는 말이라 했다.
'둔력'은 의사들이 쓰는 의학용어만도 아니었다. 대법원의 법률정보 사이트에 <판례>에 들어가 '둔력'을 넣으니 우리나라 판결문에 숱하게 '둔력'이 쓰이고 있었다. 의학 용어를 의사만 쓰는 게 아니라 판사들이 즐겨 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의사와 판사는 서로 협업하나? 전혀 다른 직종 같지만 서로 통하는 데가 있는 듯싶다.
판사들이 판결문에 일반 대중이 잘 모르는 단어를 자주 쓴다. '둔력' 말고 '태양'이란 말도 그렇다. 판결문에 나오는 태양은 太陽이 아니라 態樣이다. '태양'은 국어사전에 있는 말이다. '생긴 모습이나 형태'라는 뜻이다. 국어사전에는 있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대중은 잘 모르는 말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판결문에는 '태양'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쓰이는지 모른다. 특히 '행위 태양'으로 자주 쓰인다. '행위의 모습' 또는 '행위의 양상'이란 뜻일 것이다.
판결문은 판사들끼리 보기 위해 작성하는 글이 아니다. 원고, 피고와 그 대리인, 그리고 그 가족 등이 읽으라고 쓴 글이다. 그런데 그들이 잘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다. 모르면 배워서 이해하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법관들이 너무 고자세다. '태양'은 법 자체에 원죄가 있다. 민법 제197조의 제목이 '占有의 態樣'이다. 법에 그 말이 나온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전문직의 태도가 아쉽다. 고고하다 해야 하나 도도하다 해야 하나. 아니면 둔감한가.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