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 수 있으니 여간 다행이 아니다
2023년 마지막날을 좀 특이하게 보냈다. 나 자신을 혹사했다. 안양시 석수동에서 서울 성북동까지 30km를 걸었다. 7시간 반 동안. 아침 6시 52분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오후 2시 반이었다. 목적지는 한 중국집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 먹으러 차 타지 않고 집에서 걸어서 중국집까지 간 셈이다. 가서 곱빼기로 한 그릇을 깨끗이 게눈 감추듯 비우고 군만두까지 한 접시 해치웠다. 43,385보 걸은 뒤에.
처음 한 시간 이상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걸었다. 처음부터 비옷을 입고 출발했다. 가산디지털역 부근에 이르니 비가 그쳐 비옷을 벗었다. 남구로역, 대림역을 지나치고 도림천을 따라 걸으니 신도림역이 나왔다. 영등포역을 지나서는 영등포로터리를 통과하는 것이 난관이었다. 자그만 샛길까지 치면 무려 여덟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 영등포로터리고 모든 길에 횡단보도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별 시행착오 없이 잘 통과했고 신길역, 대방역, 노량진역, 노들역을 지나 드디어 한강대교에 이르렀다.
도중에 노들섬 부근에 굉장히 특이한 표지가 다리에 새겨져 있다. 단기 4289년 5월 복구라 적혀 있었다. 1958년 5월에 한강대교가 복구됐을 때 새겨진 것 같다. 나 태어나기도 전이다. 드디어 한강을 건넜다. 신용산역, 삼각지역도 지나고 남영역 부근을 통과해서 서울역 앞에서 남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 이르렀는데 아이스링크가 그곳에 있었다. 청계천을 좀 걷다가 길이 질척질척해 도저히 걸을 수 없었다. 광통교, 광교, 장통교를 차례로 지난 뒤 삼일빌딩 앞으로 올라와 원남동사거리, 혜화동로터리 지나 드디어 한성대입구역에 다다랐다. 그리고 곧 목적지인 옛날중국집에 이르니 7시간 27분이 지나 있었다. 오후 2시 반 가까웠지만 다행히 음식점은 영업 중이었고 손님이 여간 많지 않았다. 짜장면 맛이 꿀맛이었다.
요즘은 대중교통이 워낙 발달해 있어 사람들이 잘 걷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엄청 걸었을 것이다. 농경시대에도 일하느라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지 않았을까. 현대에 와서 잘 걷지 않을 뿐이다. 걸을 데도 그리 마땅치 않다. 그런데 오늘 30km 걸었으니 상당히 걸은 거 맞다. 그러나 비교를 한두 세대 전으로 돌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6.25 피란길에 윗세대 분들은 아기 업고 머리에 짐 이고 양손에 짐보따리 들고 수십 리를 걸어야 했다. 옷도 얇고 신발도 시원찮은데... 어디 그뿐인가. 하늘에서 야크기가 쏘아대는 기총 소사에 에 걷다가 풀숲에 옆드려 몸을 피하며 공포에 떨었던 이들이 어디 한둘일까. 그런 말도 못할 고생과 비교할 때 오늘 나의 걸음은 가볍기가 깃털 같았다. 아무것도 이거나 메거나 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옷은 따스했고 신발은 탄력 있었다. 거리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여유 있는 차림이 또 있을까. 단지 거리가 꽤 됐을 뿐이다.
어쨌든 걷고 나니 개운하다. 제법 큰일을 한 것만 같은 착각마저 느낀다. 별것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걷기도 중독성이 있음을 알았다. 귀가하는 길에 지하철을 한 정거장 미리 내려서 3.6km를 또 걸어서 집에 왔던 것이다. 마치 전날 술을 꽤나 먹은 사람이 아침에 해장술을 먹는 것처럼 정리운동 삼아 걸었다. 걸을 수 있으니 여간 다행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