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일 현재 우리나라에 시행되고 있는 법률은 1,613개이다. 이렇게 많은 법률이 있지만 대부분의 법률은 한글 전용을 하고 있다. 한자가 없다. 간혹 한자가 필요한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부 몇몇 법률만큼은 국한 혼용이다.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이 대표적이다.
이들 법률이 국한 혼용인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1950년대나 1960년대 초반에 제정될 때 국한 혼용을 했고 그게 지금껏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한자로 씌어 있으면 읽지 못하는 국민이 있을까봐 죄다 한글로 바꿔서 보여주고 있지만 엄연히 공식적으로는 국한 혼용인 상태이다.
이번에 새로 나올 <대한민국의 법은 아직도 1950년대입니다>의 표지에 이 책에서 가리키는 법이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임을 보이기 위해 흐릿하게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을 넣기로 했다. 그런데 한글로 넣기보다는 실제 이들 법이 국한 혼용이므로 한자로 넣는 게 좋겠다 싶어 편집 디자이너에게 한자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디자이너가 하는 말이 그 한자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의 한자도 모른다니 씁쓸했다. 하긴 그것들이 한자로 쓰인 걸 본 적이 없다면 모르는 것은 어쩌면 오히려 당연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 기사는 한자투성이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오면서 서서히 한자는 사라져 갔고 2000년 이후 들어서는 더욱 그랬다. 요즘 한자를 알고 싶어도 쓰는 데가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옛날 생각이 난다. 20~40년 전 말이다. 한글 전용론자와 국한 혼용론자들 사이의 논쟁은 참으로 격렬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날카롭게 대립했다. 2024년인 지금 이젠 그런 싸움을 볼 수 없다. 한자가 쓰이지 않고 있는 마당에 그런 싸움이 일어날 까닭이 없다. 세상이 그만큼 번했다.
한자 사용을 주장했던 이들은 한자를 안 쓰면 큰일날 것 같이 말했지만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평온하게 돌아가고 있다. 한자를 안 써도 의사소통에 별 지장이 없다. 그렇기는 한데 民, 法, 刑, 商, 刑事訴訟 같은 한자도 모르는 세대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랍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