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당하는 맞춤법
청계천은 북악산, 인왕산에서 발원해 서울 시내를 동서로 관통해 흐르다 중랑천을 만나 한강으로 합류한다. 복개되었던 청계천이 다시 제 모습을 되찾고서 멋진 산책로가 양쪽으로 났다. 오늘은 을지로 4가 부근에서 청계천으로 내려선 뒤 살곶이다리까지 보행자 전용로를 걸었다. 이어서 성수동까지 내처 갔고... 훌륭한 나들이였다.
도중에 성동구청에서 내건 현수막을 보고 뜨악했다. 나란히 걸린 두 개의 현수막에서 한 현수막에는 '맨발로 걷는 황톳길 안내'라 돼 있었는데 다른 현수막에는 '동절기 황토길 운영 중단 안내'라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맨발로 걷는 황톳길 안내'가 먼저 걸렸고 최근에 '동절기 황토길 운영 중단 안내'가 그 옆에 걸린 게 아닌가 싶었다. 어쨌거나 하나는 '황톳길'인데 다른 하나는 '황토길'이니 어찌 뜨악하지 않나.
서로 다르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현수막을 건 것인지 다른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만일 후자라면 먼저 내걸린 현수막의 '황톳길'이 문제 있다 보고 새로 만든 현수막에는 '황토길'로 쓴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국어사전엔 어떻게 돼 있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돼 있다.
사전에는 '황토길'이 아니라 '황톳길'이라 돼 있는데 왜 동절기 운영 중단을 알리는 안내에서 '황토길'이라 썼을까. 아마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대로 썼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사전에 '황톳길'이라 돼 있는 걸 알지만 그게 못마땅해서 '황토길'로 썼을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간에 한 현수막에는 '황톳길', 다른 현수막에는 '황토길'로 된 걸 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구청에서 건 현수막인데 관에서 말에 대해 무심한 것 같아 그렇고 한편으로는 왜 사전은 '황톳길'로 해 놓아서 혼란을 자초하는지 안타깝다.
사전을 내세우고 한글 맞춤법 제30항을 제발 들먹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전과 맞춤법이 금과옥조인가.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그렇지 않다. 오늘 성수동의 골목과 시장을 지날 때 많은 음식점의 간판에 '순대국'이라고 돼 있었지 '순댓국'이라 돼 있는 간판은 없었다. 국어사전에 '순댓국'이라 돼 있고 한글 맞춤법에 따르면 '순댓국'이지만 말이다.
요즘 신문에서 '장밋빛'이라는 표기를 보고도 실은 맘이 편치 않다. '장미빛'이면 어떻고 '장밋빛'이면 어떤가. '장밋빛'이라야 언어생활이 편리한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한글 맞춤법 제30항을 손 보지 않는 한 이런 곤혹스러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맞춤법이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지 그게 아니고 맞춤법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사람이 그 맞춤법의 노예가 돼서야 되겠는가.
맞춤법이 고시된 지 36년이나 지났지만 순댓국이라 간판을 건 음식점을 좀처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어딜 가나 순대국이라 하고 있다. 음식점 주인들을 한글 맞춤법도 모르는 무식쟁이로 계속 몰 것인가, 무도하고 멍청한 맞춤법을 손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