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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전용과 법의 비문 바로잡기는 유사한 데가 있다

2024년에는 변화의 조짐이 있기를

by 김세중

한글이냐 한자냐의 다툼과 갈등은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나라를 잃었던 일제강점기 때는 논란이 없었지만 광복 후부터 큰 문제였다. 미군정 당국이 한글 전용 원칙을 발표했지만 현실은 아주 딴판이었다. 신문은 온통 새카맣게 한자를 쓰고 있었다. 출판물도 같았다. 한글학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거의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자 옹호 세력이 훨씬 강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랬다.


박정희 대통령이 칼을 빼들었다. 1968년 10월 강력한 지시를 내린다. 한글 전용 촉진 7개 사항을 발표했다.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문서에 한글을 전용하라고 지시했다. 각급 학교 교과서에서 한자를 없애라고도 했다. 그러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이른바 지식층에서 강력히 반발했다. 그리고 언론계가 한글 전용을 지지하지 않았다. 신문에서 한자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20년도 더 지난 1990년대부터였으니까 말이다.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했다. 1968년 11월 2일 국어국문학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한글 전용은 점진적이고 자연적 변화로 이끌어야지 즉각 실시하는 것은 안 된다며 반대 입장을 발표했다. 여기에 "먼 훗날에는 어차피 실현되고야 말 한글 전용이기는 하지만"이라는 구절이 있다. 한글 전용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가 아니고 어차피 실현되고야 말 것이지만 지금은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되었다는 뜻일 텐데 후대에는 몰라도 나 때는 안 된다는 뜻 같기도 하다.


지금 우리나라 기본법인 민법, 상법, 형법 등의 조문에 비문(非文)이 굉장히 많다. 비문이란 문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문장이다. 법조문에 말이 안 되는 문장이 많다니 믿기 어렵겠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법조인들도 대체로 알고 있다. 바르게 고쳐야 한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대부분 '어차피 고쳐져야 하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인 듯하다.


민법 제2조제1항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는 문법에 맞는가? '신의에 좇아'가 말이 되는가? 안 된다는 걸 법조인들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 고쳐져야겠지만 지금은 안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35,000명에 가까운 변호사들은 왜 가만있는 것일까. 수천 명에 달하는 판사, 검사들은 왜 가만히 있나?


미룰 일이 아니다. 지금 고쳐야 한다. 눈앞에 있는 오류를 외면하고서 무슨 정의를 외치는가. 2024년에는 뭔가 변화의 조짐이 있기를 기대한다.



c2.png 1968년 11월 5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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