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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경기에서 사람됨을 보다

by 김세중

아시아의 축구 수준은 유럽과 남미에 비하면 초라한 게 사실이다. 아프리카보다 떨어진다는 말도 있다. 그렇거나 말거나 아시아인들에게는 아시안컵이 대단하다. 지금 그 아시안컵이 한창이다. 16강은 가려졌고 8강을 가리는 경기가 치러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 새벽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8강 진출을 놓고 겨뤘다.


공식적인 기록은 무승부지만 8강 진출은 한국이 했다. 승부차기에서 한국이 사우디를 이겼기 때문이다. 한국은 네 명이 다 성공시켰지만 사우디는 3번, 4번이 실축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한국의 4번 키커 황희찬이 아직 차지도 않았는데 사우디의 만치니 감독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비록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희망이 남아 있는 거 아닌가. 만일 황희찬이 실축이라도 하면 사우디의 회생 가능성은 갑자기 높아진다. 사우디의 5번 키커가 성공시키고 이어서 한국의 5번 키커가 만일 실축하면 3 대 3 동점이 되면서 승부차기는 이제부터다. 비록 가능성은 낮아 보여도 불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13년 전인 2011년 아시안컵 준결승 때 한국은 일본과 연장전에 이은 승부차기에서 1, 2, 3번 키커가 모두 실축한 적이 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할지 몰라도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 아닌가.


물론 관객이라면 황희찬의 킥을 보지 않고도 일어나서 갈 수 있다. 황희찬이 실축하고 사우디 선수가 성공시키고 또 한국 선수가 실축해야 비로소 새로 시작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단 건 누구나 안다. 실제로 사우디의 4번 선수가 실축하자 황희찬이 차지도 않았는데 사우디 관객들이 수십 명 일어나 우르르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유튜브에 나왔다. 안 봐도 비디오 아니겠냐 하며 우르르 일어서서 나간 것이다.


그러나 사우디 관객과 사우디 국가대표 감독이 어디 같은가. 감독이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마땅한 거 아닌가. 감독이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사우디 골키퍼가 힘이 났겠는가. 자포자기하지 않았겠나. 비록 만치니 감독이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 우승도 하고 유로2020과 세리에 A 우승도 한 대단한 명장이라 해도 이날의 성급하고 경솔한 행동으로 명성이 퇴색하고 말았다. 한번 잃은 명예를 회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한편 이 날 승부차기가 끝나고 한국 선수들이 기쁨에 겨워 서로 얼싸안고 감격을 나누고 있을 때 주장인 손흥민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나 봤더니 그는 홀로 사우디 선수들 쪽으로 가 한 명 한 명 안아주고 있었다. 거의 내 눈을 의심할 만큼 놀라운 행동이었다. 손흥민은 범인이 아닌 듯하다. 그의 사람됨을 높이 사고 싶다. 축구 실력도 출중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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