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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점 방문기 (1)

우리말은 그저 '그까이꺼'인가

by 김세중

일전에 인천의 헌책방 거리인 배다리헌책방거리에 갔다가 서울 청계천에서는 더는 보지 못하는 헌책방들을 보고 왔다. 더구나 한 서점에서는 내게 꼭 필요한 한 책을 발견해 얼른 사가지고 왔다. 값도 저렴했다. 인천에서 짭짤한 수확(?)을 거두고 나니 다른 지역에 흥미를 느껴 연휴 마지막날 일부러 천안을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또 매우 독특한 헌책방을 발견했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서점에 들어서니 주인이 무슨 책을 찾느냐 물었고 옛 법전을 구하고자 한다 대답하니 잠시 기다리라 하더니 두 권을 꺼내 왔다. 한 권은 융희 2년에 나온 법령집이었고 다른 한 권은 1959년에 초판이 나오고 1966년에 인쇄된 현암사 법령집이었다. 융희 2년이면 1908년이다. 무려 116년 전의 책이었는데 상태가 아주 깨끗했다. 1966년의 법령집도 상태가 좋았다. 값이 좀 비싸다며 20만원이라 했다. 실은 30만원인데 연휴 마지막날이고 해서 낮춰 부르는 거라 했다. 1966년 법령집은 몰라도 1908년의 책은 20만원이면 결코 비싼 게 아니었다. 내가 법사학자였다면 두 권을 냉큼 샀겠지만 난 언어학도지 법학 연구자가 아니기에 살 생각은 접었다. 대신 1966년 법령집을 넘겨보면서 대단히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민법 제195조를 보니 "家事上, 營業上 其他 類似한 關係에 依하여 他人의 指示를 받아 物件에 對한 事實上의 支配를 하는 때에는 그 他人만을 占有者로 한다."라 되어 있지 않은가!


c.png 화질이 좋지 않지만 '받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1966년에 나온 현암사 법령집에서 민법 제195조는 '타인의 지시를 받'라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민법 제195조는 어떻게 돼 있나? '타인의 지시를 받'라 돼 있다.


c.png


왜 1966년 법령집에는 '받'라 돼 있는데 지금 민법은 '받'라 돼 있을까. 법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도무지 관심이 없을 것이다. '받'면 어떻고 '받'면 어떤가. 뜻이 같은데! 그러나 언어학자의 눈에는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유는 이렇다.


민법은 1958년 2월 22일 제정, 공포됐다. 그리고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민법이 제정, 공포됐을 때 제195조는 '他人의指示를받어'라 돼 있었다. 분명히 '받어'였다. 그걸 현암사에서 법령집으로 만들면서 '他人의 指示를 받아'라고 바로잡은 것이다. 법령 개정도 없이 오타니까 바로잡았겠지... 그러나 오늘날 법제처는 법령정보센터를 통해 국민에게 법조문을 제공하고 있는데 '타인의 지시를 받어'라고 제공해 보이고 있다. 왜? 민법 제정 때 '他人의指示를받어'라 돼 있었고 그 후 개정이 없었으니 그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1966년 현암사 법령집의 '他人의 指示를 받아'는 내 눈에 무척 흥미로웠다. 법학자들한텐 전혀 관심이 없는, 문제거리도 되지 않는 거지만 어학자에겐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말은 너무나 소홀히 여기고 있다. 우리말은 그저 '그까이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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