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국의 공용어를 알 수 없는 경우?
우리나라에 법률이 1,600개가 넘는다. 그중 하나가 국제민사사법공조법이다. 1991년 3월 제정되었다. 외국과의 사법공조 필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사법공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이 법의 제7조는 다음과 같다.
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단어가 몇 눈에 띈다. 공무소는 법조문에는 잘 나오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관청이라는 말이 흔하게 쓰인다. 뜻이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할 것이다. 촉탁이란 맡기고 의뢰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 외국의 공용어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이라는 표현이 있다.
처음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 외국의 공용어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무슨 뜻인지 순간 헷갈릴 것이다. 그 외국의 공용어가 어떤 언어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인지 그 외국의 공용어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인지 분명치 않다. '알 수 없는'의 '알'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알다'라는 말은 간단치 않다. 철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일상생활에서 '알다'라는 말도 녹록지 않다.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 하고 갈파하지 않았나. 법조문은 명확, 명료해야 한다. '그 외국의 공용어를 알 수 없는 경우'는 명확, 명료하지 않다. 누가 그 외국의 공용어를 알 수 없다는 건가? 그 외국의 공용어의 무엇을 알 수 없다는 건가?
그렇게 표현하기보다는 '그 외국의 공용어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이라 하든지 '그 외국의 공용어를 이해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경우에는'이라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영어, 일본어, 중국어 같은 언어로 된 문서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쉽다. 그러나 만일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된 문서가 첨부되었다 치자. 사법공조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영어로 된 번역문을 첨부할 수 있다고 한 것 아니겠나. 법조문은 좀 더 친절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