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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n 19. 2024

신의에 좇아

오역은 언제 바로잡힐까

(전략)

일반적으로 권리의 행사는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하고 권리는 남용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권리자가 실제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 권리행사의 기대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이 경과하도록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여, 의무자인 상대방으로서도 이제는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할 것으로 신뢰할 만한 정당한 기대를 가지게 된 다음에, 새삼스럽게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법질서 전체를 지배하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결과가 될 때에는, 이른바 실효의 원칙에 따라 그 권리의 행사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후략)


2024.02.08 대구지방법원의 해고무효확인 사건 판결문 일부다. 한 문장인데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히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법원 판결문이나 공소장은 전통적으로 대단히 길었다. 요즘 과거보다 많이 짧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길게 느껴지는 판결문 문장이 많다. 짤막한 문장으로 판결문을 쓰기에는 사건 자체가 복잡하고 논리 전개상 불가피하게 길어질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문장의 길고 짧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긴 문장이 나쁘고 짧은 문장이 좋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불필요하게 긴 문장은 없는지, 그래서 이해를 가로막는 경우는 없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늘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위 문장에 '신의에 좇아'가 나오고 '원칙에 위반하는'이 나온다. 이 두 구절이 어이없음을 말하고자 한다. 먼저 '신의에 좇아'를 보자. '좇다'는 '부귀를 좇다', '권력을 좇다', '명예를 좇다' 등에서 보는 것처럼 타동사이다. 타동사의 목적어에는 조사 '을/를'이 와야 한다. 그렇다면 '신의를 좇아'여야지 '신의에 좇아'여야 할 까닭이 조금도 없다. 이는 민법 제2조 제1항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에 나오는 '신의에 좇아'를 맹목적으로 따라 쓴 것일 뿐이다. 그럼 왜 민법 제2조 제1항은 '신의에 좇아'라 했나? 일본 민법 제1조 "権利の行使及び義務の履行は、信義に従い誠実に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를 잘못 번역한 거 아닌가. 일본 민법에서 동사 ''을 썼으니 '좇아'라 했고 조사 ''를 썼으니 '신의'라고 한 것 아닌가. 부정할 수 있나?


2002년에 민사소송법이 개정되었다. 그 전까지 민사소송법 제1조는 "當事者와 관계인은 信義에 좇아 성실하게 이에 協力하여야 한다"였다. 민법 제2조 제1항과 같았다. 그런데 2002년에 개정하면서 "당사자와 소송관계인은 신의에 따라 성실하게 소송을 수행하여야 한다"로 바뀌었다. '신의에 좇아'가 잘못된 표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민사소송법 제1조는 '신의에 따라'라 되어 있다. 그러나 민법의 '신의에 좇아'는 지금도 그대로이다. 


사실 민법도 개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2015년에 법무부는 국회에 민법을 통째로 새로 쓴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2019년에도 또 제출했지만 두 번 다 국회에서 처리하지 않아 폐기됐다. 그 두 차례 개정 시도 때 민법 제2조 제1항의 '신의에 좇아'는 '신의를 지켜'로 바뀌어 있었다. 민사소송법 제1조 '신의에 따라'보다 진일보한 안이었다. 그러나 법이 개정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바람에 지금도 '신의에 좇아'다. 그리고 2024년 2월의 대구지방법원의 판결문에까지 그대로 답습되어 있다. 왜 민사소송법은 바르게 고쳐졌는데 민법은 틀린 표현을 그대로 두고 있나. 그래서 2024년의 판결문에까지 그대로 인용되도록 하고 있나. 아마 앞으로도 판결문에서 '신의에 좇아'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위 판결문의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하는'도 마찬가지다. '위반하다'는 타동사다. 그래서 목적어에 '을/를' 조사가 와야 한다. '규정을 위반하다', '규칙을 위반하다', '법규를 위반하다'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신의성실의 원칙 위반하는'이라 하나. 단 하나의 오류도 없어야 할 판결문에서 말이다. 판결문의 이런 부끄러운 표현도 민법 조문의 숱한 '~ 위반하다'에 근거하고 있고 민법의 '~ 위반하다'도 일본 민법의 '~反する'을 오역한 것 아닌가. 내년이면 광복 80주년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다. 국회의원들이 분발해야 한다. 그들에게 입법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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