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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l 24. 2024

변호인의 선임은 변호인과 연명날인한 서면으로 제출해야?

암호문 같다


1954년 9월 23일 관보에 실린 형사소송법 제32조 제1항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 일이다. 이때 형사소송법이 제정되었다. 그때까지는 일제의 '조선형사령'을 쓰고 있었는데 비로소 우리의 형사소송법을 갖게 되었다. 


1954년 당시에는 오랜 우리나라 전통대로 위에서 아래로 썼다. 횡서가 아니라 종서를 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행을 옮겼다. 그리고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모든 단어를 붙여서 썼다. 그리고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지금과는 참으로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자어는 죄다 한자로 적었다. 한글은 그저 조사나 어미 그리고 '하다' 정도를 적을 때만 썼다. 


지금은 어떤가. 종서는 사라진 지 오래다. 어떤 책도 종서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반드시 띄어쓰기를 한다. 마침표는 당연히 찍는다. 그리고 한자어라고 한자로 적지 않는다. 한글로 적는다. 얼마나 달라졌나. 이렇게 많이 달라졌지만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글의 내용이다.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당시의 제32조 제1항과 지금의 제32조 제1항은 내용이 똑같다.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횡서를 하고 띄어쓰기를 하고 한글로 표기했을 뿐 내용은 완벽하게 같다. 지금 형사소송법 제32조 제1항은 다음과 같다.


제32조(변호인선임의 효력) 

변호인의 선임은 심급마다 변호인과 연명날인한 서면으로 제출하여야 한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변호인의 선임은 심급마다 변호인과 연명날인한 서면으로 제출하여야 한다."라는 문장은 말이 되나? '선임을 제출하다'라는 말이 있나? '선임을 제출하다'라는 말이 있다면 물론 말이 되지만 '선임을 제출하다'라는 말은 없다. 따라서 "변호인의 선임은 심급마다 변호인과 연명날인한 서면으로 제출하여야 한다."라는 문장에는 '제출하여야'의 목적어가 없다. '제출하다'는 목적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동사인데 목적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안 된다.


"변호인의 선임은 심급마다 변호인과 연명날인한 서면으로 제출하여야 한다."라고만 해도 '제출하여야'의 목적어로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신고서'든 '선임계'든 일정한 양식의 서면을 제출해야 한다는 뜻인 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출하여야'의 목적어를 생략할 수 있는 근거가 되나. 안 된다고 본다. 마땅히 있어야 할 목적어를 빠뜨린 문장이 1954년에 형사소송법을 제정할 때 만들어졌고 70년 동안 요지부동 그대로다. 대충 뜻을 짐작할 수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지금에까지 이르렀겠지만 이 어색하고 이상한 문장을 왜 그대로 두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법조문은 읽고 또 읽어도 한 점 의문이 들지 않는 완벽한 문장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변호인의 선임은 심급마다 변호인과 연명날인한 서면으로 제출하여야 한다."는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하다. 뭘 제출해야 하는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조인들은 이 이상한 문장에 푹 젖어 의문을 느끼지 않는다. 법조문을 우연히 읽게 되는 일반인만 어리둥절한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법적 안정성이 중요해서 잘못된 법조문도 손대지 않는 건가. 내용을 고치자는 게 아니라 표현을 바로잡자는 건데도 싫은가? 낡고 문제 있는 법조문은 바르게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변호인의 선임은 심급마다 변호인과 연명날인한 서면으로 제출하여야 한다."를 읽을 때마다 개운치 않다. 무슨 암호문 같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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