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Aug 01. 2024

헌법에도 비문이 있다니!

우리는 국어에 무관심한 국민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57조는 다음과 같다.


헌법

제57조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


여기서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가 눈길을 끈다. 어떤가. 이상한가, 이상하지 않은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줄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뭐가 문제인지를 모를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금액', '증가'에서 이미 법조문의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가 제출한 예산 각항의 금액을 국회가 늘리고자 한다면 '정부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더 이상 문제를 못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정부의 동의 없이 국회가 마구 예산 금액을 늘리거나 새 비목을 넣는다면 정부로서는 여간 난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 제57조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된다. 국회가 예산 금액을 늘리거나 새 비목을 넣으려면 정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헌법은 정부와 국회 사이에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잘 마련해 둔 것 같다. 


그런데 법조문의 취지는 그렇다 치고 조문의 표현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금액을 증가하거나'라 했는데 이게 자연스러운가 말이다. '증가하다'는 타동사가 아니고 자동사이다. '증가하다'가 자동사라는 것은 '증가하다'에는 목적어가 있어서는 안 됨을 뜻한다. 그런데 '금액을 증가하거나'라고 했다. '금액을'이라는 목적어가 나타났다. 어찌 된 일인가.


요컨대 헌법 제57조의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는 국어 문법을 소홀히 여기고 작성한 틀린 표현이다. '증가하다'는 '부채가 증가하다', '생산량이 증가하다', '수출이 증가하다' 등에서 보듯이 자동사로 쓰이는 말이다. '증가하다'는 타동사로 쓰이지 않는다. '부채를 증가하다', '생산량을 증가하다', '수출을 증가하다'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문제는 헌법에 '금액을 증가하거나'란 표현이 들어가다 보니 이걸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헌법은 워낙 권위가 있는 규범이니 틀린 표현이 쓰였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자꾸 이 조문을 접하다 보면 점점 더 익숙해져서 더욱 의심을 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헌법에 대한 경외심, 복종심이 헌법 조문에 들어 있는 오류에 대해서도 눈 감게 만들었다. 그러나 틀린 건 틀린 거다.


헌법 제57조의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는 '각항의 금액을 늘리거나' 또는 '각항의 금액을 증액하거나'라고 해야 맞다. 굳이 '증가'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면 '각항의 금액을 증가시키거나'라 해야 한다. 그래야 문법적인 국어 문장이 된다. 1948년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 들어간 '금액을 증가하거나'가 그동안 아홉 차례 헌법을 개정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그대로다. 우리는 국어에 이토록 무관심한 국민인가. 다음 헌법 개정 때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원물로부터 분리하는 때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