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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09. 2024

뭔가 이상한 법조문

알고 보니 조사를 잘못 썼다

민법은 모든 사람이 살아가면서 적용받는 법이다. 법조인이 아닌 이상 국민 대부분이 아마 한 번도 민법 조문을 읽어보지 않고 인생을 마치겠지만 누군가와 재산상의 분쟁이 발생하면 민법의 적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민법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일들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규정을 두고 있다. 


물론 법적 분쟁이 생기면 변호사나 법무사에게 찾아가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들이 일을 대신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국민은 법조문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애초부터 법은 일반 국민은 읽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만들었을까. 그럴 턱이 없다. 법은 모든 국민에게 열려 있다. 법조인이 읽을 수도 있고 일반 국민도 당연히 읽을 수 있다. 그런 법은 문법을 지켜야 한다. 이건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이 당연한 명제가 지켜지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민법 제478조는 다음과 같다.


민법

제478조(부족변제의 충당) 1개의 채무에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에 변제자가 그 채무전부를 소멸하게 하지 못한 급여를 한 때에는 전2조의 규정을 준용한다.


이 조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 갑이 을에게 빚을 졌는데 한꺼번에 갚지 않고 여러 차례에 걸쳐 나누어 갚기로 한 경우에 대한 규정이다. 그런 경우를 '1개의 채무에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라고 한 것이다. 알고 보면 매우 이해하기 쉬운 경우를 '1개의 채무에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라고 뭔가 이상야릇하게 표현했는데 '1개의 채무에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가 왜 이상하게 느껴질까. 이유가 있다.


'1개의 채무에 수개의 급여를 요할'이 주어가 없기 때문이다. 동사는 '요할'인데 '요할'의 주어가 없다. '1개의 채무'가 주어 같기는 한데 조사 ''가 붙어 있기 때문에 '1개의 채무에'는 주어일 수가 없다. 의미상으로는 분명히 주어인데 조사 ''가 붙어 있어서 주어가 아니다. 결국 조사를 잘못 썼다. '1개의 채무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라고 했다면 의문을 느끼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 텐데 '1개의 채무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라 되어 있는 바람에 뭔가 께름칙하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조사'는 한자 詞에서 보듯이 '돕는' 말이지 중심이 되는 말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조사를 잘못 써도 그게 잘못된 줄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 '1개의 채무에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란 표현이 뭔가 이상해도 왜 이상한지 대개 잘 알지 못한다. 1950년대에 민법을 제정할 때 국어에 정통한 사람들이 법조문 작성에 관여했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법 제정에 국어학자는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이런 오류가 바로잡히지 않았고 지금도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그 일차 피해자는 법을 처음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그들은 이상야릇한 법조문을 읽으며 께름칙함을 금치 못한다. 뭐가 잘못된 건지 속시원히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1개의 채무 수개의 급여를 요할 경우'와 같이 조사를 잘못 쓴 법조문은 바로잡아야 한다. 법을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 일반 국민도 법조문을 읽고 이해할 권리가 당연히 있는데 이런 이상한 법조문을 국민이 읽고 이해할 수 있겠나. 입법권은 국회가 갖고 있는데 국회의원들이 정쟁에만 함몰돼 있을 게 아니다. 해묵은 오류를 바로잡을 의무가 그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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