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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08. 2024

우리 법조문의 일본어 잔재

부끄럽지 않나

'위반하다', '좇다'는 타동사이기 때문에 목적어가 있어야 하고 그 목적어에는 조사 '을/를'이 쓰여야 하는데 우리 법조문에는 엉뚱하게 조사 ''가 쓰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어 문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위반하다', '좇다'뿐이 아니다. 민법 제1022조를 보자.


민법

제1022조(상속재산의 관리) 상속인은 그 고유재산에 대하는 것과 동일한 주의로 상속재산을 관리하여야 한다. 그러나 단순승인 또는 포기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그 고유재산에 대하는 것과 동일한 주의로'라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은가. 누구든 이 대목을 읽으며 고개가 갸우뚱할 것이다. 뭔가 자연스럽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 그 이유는 '대하다'라는 동사는 '~을/를 대하다'처럼 쓰이는 타동사인데 '고유재산'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사가 잘못 쓰였다.


왜 민법 제1022조에 '고유재산에 대하는'과 같은 결코 한국어답지 않은 표현이 등장하게 되었을까. 워낙 많은 민법 조항이 일본 민법과 닮아서 별로 놀랍지 않지만 민법 제1022조는 일본 민법의 해당 조항과 판박이다. 해당 일본 민법 조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 민법

第九百十八条 相続人は、その固有財産おけるのと同一の注意をもって、相続財産を管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ただし、相続の承認又は放棄をしたときは、この限りでない。


이 조문을 우리 민법이 받아들이면서 'おける'를 '대하다'로 옮겼는데 그렇다면 '대하다'는 타동사이기 때문에 목적어 '고유재산' 뒤에는 조사 ''을 써야 했는데 ''를 썼다. 일본 법조문에 ''가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아주 이상한 표현이 되고 말았다. 많은 민법 조문이 그 문장만 읽고서는 깊은 속뜻을 알기가 어렵다. 뒤에 숨어 있는 많은 배경 지식이 있어야 그 조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조사를 잘못 쓰는 바람에 표현 자체가 어색하니 더더욱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민법 제259조 제1항에도 역시 같은 문제가 있다.


제259조(가공) ①타인의 동산에 가공한 때에는 그 물건의 소유권은 원재료의 소유자에게 속한다. 그러나 가공으로 인한 가액의 증가가 원재료의 가액보다 현저히 다액인 때에는 가공자의 소유로 한다.


제1022조의 '고유재산에 대하는'만큼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타인의 동산에 가공한 때에는'에서 조사 ''도 '가공한'과 맞지 않는다. '가공하다'는 '~을/를 가공하다'처럼 쓰이는 타동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조항 역시 일본 민법의 해당 조항을 빼다박았다. 다음과 같다.


第二百四十六条 他人の動産工作を加えた者(以下この条において「加工者」という。)があるときは、その加工物の所有権は、材料の所有者に帰属する。ただし、工作によって生じた価格が材料の価格を著しく超えるときは、加工者がその加工物の所有権を取得する。


일본 민법의 '工作を加えた'를 '가공한'으로 바꾸었고 조사 ''는 ''로 옮겼다. '가공하다'는 타동사이기 때문에 목적어 '동산'에 조사 ''을 써야 하지만 ''를 쓴 것이다.


일본 법을 받아들인 것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일본 민법 역시 서양 민법을 받아들인 것 아닌가. 문제는 반듯하고 바른 한국어 표현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읽어도 무슨 말인지 좀처럼 잘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 기본법 조문에 잘못된 번역이 참 많다. 일본 글자(가나)가 적혀 있어야만 일본어 잔재일까. 아니다. 일본어를 잘못 번역한 우리말도 일본어 잔재 아닌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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