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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12. 2024

다툼의 여지 없는 명백한 오류

재판을 할 것으로 명백한 때에는?

국어에서 조사는 단어와 단어의 관계를 명확히 해 주고 그럼으로써 문장의 의미를 드러내 준다. 그런데 이런 조사를 만일  쓰지 않았다고 치자. 예를 들어 "철수 영희 결혼했다."처럼 조사를 쓰지 않으면 이 문장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무슨 뜻일까 골똘히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조사를 써서 "철수 영희 결혼했다."라고 하면 철수와 영희가 부부가 됐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철수와 영희가 각각 딴 사람과 결혼한, '기혼자'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만일 "철수 영희 결혼했다."라고 하면 철수와 영희가 부부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조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문장의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문맥에 맞는 조사를 쓸 때 비로소 문장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만 우리나라 기본법에는 이런 문장이 법조문에 들어 있다는 게 과연 사실인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조사를 잘못 쓴 문장이 있다. 형사소송법 제306조 제4항이 그렇다. 


형사소송법

제306조(공판절차의 정지) 

④피고사건에 대하여 무죄, 면소, 형의 면제 또는 공소기각의 재판을 할 것으로 명백한 때에는 제1항, 제2항의 사유있는 경우에도 피고인의 출정없이 재판할 수 있다.


'무죄, 면소, 형의 면제 또는 공소기각의 재판을 할 것으로 명백한 때에는'이라는 구절이 있다. 아무리 읽어도 아리송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명백한'의 주어가 없기 때문이다. 뭐가 명백한지가 없다. '무죄, 면소, 형의 면제 또는 공소기각의 재판을 할 것으로'는 부사격조사 '으로'가 붙어 있어서 주어일 수 없다. '무죄, 면소, 형의 면제 또는 공소기각의 재판을 할 것'였다면 아무 의문이 들지 않을 텐데 조사를 잘못 쓴 것이다.


이런 실수는 요즘이라면 웬만한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것인데 1954년 형사소송법을 제정할 때 이런 오류를 범했다. 그리고 무려 70년이 지나도록 고치지 않았고 지금도 그대로이다. 법조문에 이런 오류가 들어 있어도 괜찮은가. 무슨 뜻인지만 파악되면 그뿐이란 말인가.


'재판을 할 것으로'를 그대로 두려면 그 뒤는 '보일 때에는', '예상될 때에는'과 같은 말을 써야 앞뒤가 호응한다. '재판을 할 것으로 명백한 때에는'은 다툼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명백한 오류다. 국가 기본법에 이런 말이 안 되는 표현이 70년째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런 법을 국민에게 따르라 한다. 오류가 있는 법은 바르게 고치고 정비해야 하지 않나. 그걸 왜 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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