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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28. 2024

다른 정함을 할 수 있다?

법조문의 정상화가 절실하다

우리나라 상법에는 '다른 정함'이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쓰이고 있다. '다른 정함이 없으면'(제86조의5, 제364조, 제562조, 제564조,  ), '다른 정함이 없는 경우에도'(제344조), '다른 정함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제358조의2, 제360조의13, 제368조, 제527조의4), '다른 정함이 있는 경우 외에는'(제408조, 제580조, 제612조), '다른 정함이 있거나'(제531조), '다른 정함이 없더라도'(제586조) 등이 그것이다. 


'정하다'라는 동사에 명사형 어미 '-'을 붙여서 명사처럼 만든 다음 거기에 '있다', '없다'를 붙였는데 이런 말을 딱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엄연히 다른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 있는데 굳이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을 썼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 예를 보자. 상법 제364조는 주식회사의 주주총회에 관한 한 조항이다.


상법

제364조(소집지) 총회는 정관에 다른 정함이 없으면 본점소재지 또는 이에 인접한 지에 소집하여야 한다.


주식회사의 주주총회는 '정관에 다르게 규정한 게 없다면' 본점소재지 또는 이에 인접한 곳에 소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관에 다른 정함이 없으면'이라는 표현이 어떤가. '다른 정함이 없으면'이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표현인가. 법조문 외에서는 거의 보지 못하는 표현 아닌가. 만일 '정관에 다르게 정하지 않았다면'이라면 어떨까. 혹은 '정관에 다르게 정한 것이 없으면'이라면 또 어떨까. '정함이 없으면'보다 '정하지 않았다면'이나 '정한 것이 없으면'이 더 눈에 익고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동사의 명사형인 '정함'에 '있다', '없다'를 쓰기보다는 '정하다'라는 동사를 쓰는 게 일상언어의 용법이다. 그러나 상법에서는 일관되게 '정함이 있다', '정함이 없다'를 쓰고 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차마 봐주기 어려운 기괴한 표현까지 쓰이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음과 같다.


상법

제572조(소수사원에 의한 총회소집청구) ①자본금 총액의 100분의 3 이상에 해당하는 출자좌수를 가진 사원은 회의의 목적사항과 소집의 이유를 기재한 서면을 이사에게 제출하여 총회의 소집을 청구할 수 있다. <개정 1999. 12. 31., 2011. 4. 14.>

②전항의 규정은 정관으로 다른 정함을 할 수 있다.


제575조(사원의 의결권) 각 사원은 출자1좌마다 1개의 의결권을 가진다. 그러나 정관으로 의결권의 수에 관하여 다른 정함을 할 수 있다.


'정관으로 다른 정함을 할 수 있다'니 이게 정상적인 한국어인가. 법조문은 정상적인 한국어를 피해서 쓰게끔 되어 있기라도 한가. 왜 이런 듣도 보도 못한 표현이 법조문에 자리잡고 있나. '정관으로 다르게 정할 수 있다' 또는 '정관으로 달리 정할 수 있다' 하면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가. '정관으로 다른 정함을 할 수 있다'와 같은 괴상하고 고약한 표현은 하루빨리 법조문에서 솎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법조문의 정상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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