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Sep 02. 2024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

형법과 형사소송법에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라는 표현이 참 많이 나온다. 대개 '이러이러한 죄는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는 식이다.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지만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한 경우에는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으니 국가가 굳이 형벌권을 행사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런 죄를 반의사불벌죄라 하는데 모든 범죄가 반의사불벌죄인 것은 아니다. 일부 범죄에 그친다. 예컨대 단순 · 존속폭행죄, 과실치상죄, 단순 · 존속협박죄, 명예훼손죄 등이 반의사불벌죄이다. 또한 외국 원수에 대한 폭행 · 협박 등의 죄, 외국사절에 대한 폭행 · 협박 등의 죄도 같다. 형법 제260조를 보자.


형법

제260조(폭행, 존속폭행) ①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개정 1995. 12. 29.>

②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에 대하여 제1항의 죄를 범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5. 12. 29.>

③제1항 및 제2항의 죄는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


제3항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경우에는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폭행, 존속폭행은 반의사불벌죄라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했는데도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보아 이런 규정을 두었을 것이다. 피해자의 생각과 뜻을 존중하는 태도가 형법에 반영되어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당사자끼리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였다면 국가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에서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라는 표현이 어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명시한'은 동사인데 이 동사의 주어가 없다. '피해자'는 관형격조사 ''가 붙었기 때문에 주어가 아니다. '피해자 명시한 의사'라야 문법에 맞다. 


그런데 반드시 '피해자 명시한 의사'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동사 '명시한'을 굳이 쓸 필요가 없다. 관형사 '명시적'을 써서 '피해자의 명시적 의사'라고 하면 더욱 알기 쉽다. "피해자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가 더욱 일상언어에 가깝고 뜻이 쉽게 와닿는다.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보다 훨씬 명료하지 않은가.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는 1953년 형법 제정 때부터, 그리고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이다. 법조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문구이다 보니 그들에게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 국민의 눈에는 매우 고약하고 괴이쩍다. 이게 어디 한국말인가. 형사소송법에 나오는 "피고인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제18조 제2항, 제341조 제2항), "피공표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제260조), 형법에 나오는 "그 외국정부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제110조)도 마찬가지다. 익숙하다고 그냥 둘 것인가.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슨 뜻인지만 통하면 그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