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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Sep 13. 2024

'건정'이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건정'

형사소송법은 1954년에 제정되었다. 형사소송법을 제정하던 당시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가 똑같을 수는 없다. 말은 꾸준히 변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에는 오늘날 한국어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는 말이 군데군데 발견된다. 형법 제120조에 나오는 '건정'이 한 예이다.


제120조(집행과 필요한 처분) ①압수ㆍ수색영장의 집행에 있어서는 건정을 열거나 개봉 기타 필요한 처분을 할 수 있다.


第120條(執行과 必要한 處分) ①押收ㆍ搜索令狀의 執行에 있어서는 鍵錠을 열거나 開封 其他 必要한 處分을 할 수 있다.


'건정을 열거나'의 '건정'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건정'은 오늘날 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도 '건정'은 없다. 사전에 없으니 이 말의 뜻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답한 노릇이다. 법령집에 한자로 鍵錠이라고 되어 있으니 한자의 뜻을 가지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은 '열쇠 건' 또는 '자물쇠 건'이고 은 '덩어리 정'이다. 따라서 鍵錠은 시건 장치, 잠금 장치를 가리키는 말로 추정되기는 한다. 


그러나 한자 鍵錠으로 적혔을 때에는 鍵이 '열쇠 건', '자물쇠 건'이니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글로 '건정'이라고 해 놓으면 그게 무슨 뜻인지 당최 알 길이 없다. 요컨대 건정은 정체불명의 말이다. 그럼 중국, 일본에서는 鍵錠이란 말이 있나? 중국어에도 鍵錠 또는 键锭이라는 단어는 없다. 일본어에는 鍵錠이 있기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형사소송법 제120조의 '鍵錠'은 일본어에 뿌리를 둔 말로 보이지만 오늘날 일본어에서조차 널리 쓰이는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에 이런 정체불명의 괴상한 말이 들어 있다니 놀랍고 개탄스럽다. '건정'은 '시건 장치'나 '잠금 장치'로 바꾸어야 마땅하다. 법이 암호 같아서야 되겠는가. 법은 알려고 하는 국민이면 누구나 알 수 있게 씌어 있어야 한다. '건정'은 일반 국민은 물론 아마 법조인들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형사소송법에서 또 하나 지적할 단어가 있다. '좌석하다'이다. 형사소송법 제275조는 다음과 같다.


제275조(공판정의 심리) ①공판기일에는 공판정에서 심리한다.

②공판정은 판사와 검사, 법원사무관등이 출석하여 개정한다. <개정 2007. 6. 1.>

③검사의 좌석과 피고인 및 변호인의 좌석은 대등하며, 법대의 좌우측에 마주 보고 위치하고, 증인의 좌석은 법대의 정면에 위치한다. 다만, 피고인신문을 하는 때에는 피고인은 증인석에 좌석한다. <개정 2007. 6. 1.>


제3항에 '피고인은 증인석에 좌석한다'가 있는데 '좌석하다'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다. 누가 '좌석한다'라는 말을 쓰는가. "그는 맨 앞자리에 좌석했다."와 같은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제3항에 있는 '피고인은 증인석에 좌석한다'는 '피고인은 증인석에 위치한다' 또는 '피고인은 증인석에 자리한다' 아니면 '피고인은 증인석에 앉는다' 중의 무엇으로 바꾸어야 하겠다. 쉬운 말을 놔두고 굳이 생소한 말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법의 권위를 세우고자 함인가. 어려운 말을 써야 법의 권위가 서나. 그런 생각이 있다면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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