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Sep 26. 2024

채무이행의 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

장애물은 걷어내야 하지 않나

앞에서 민법 제148조 "조건있는 법률행위의 당사자는 조건의 성부가 미정 동안에 조건의 성취로 인하여 생길 상대방의 이익을 해하지 못한다."의 '미정한 동안에'는 '미정인 동안에'가 낫고 '확정되지 않은 동안에', '정해지지 않은 동안에'라고 한다면 더 알기 쉽다고 했다. 현행 민법의 '미정한'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민법 제387조에도 아주 흡사한 문제가 있다. 제387조는 민법 채권 편의 총칙 제2절 채권의 효력에 처음 나오는 조항이다. 여기서 "채무이행의 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기한이 도래한 때로부터 지체책임이 있다."는 채권자에 대한 채무에 지체가 있다면 그 책임이 언제부터 생기느냐를 규정한다. 다음과 같다.


민법

제387조(이행기와 이행지체) ①채무이행의 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기한이 도래한 때로부터 지체책임이 있다. 채무이행의 불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기한이 도래함을 안 때로부터 지체책임이 있다.

②채무이행의 기한이 없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이행청구를 받은 때로부터 지체책임이 있다.


이 조항의 의미는 무엇인가. 채무가 있는데 채무를 지체했다면 그 지체는 언제부터 발생하는가. 정해진 기한이 있는 경우라면 당연히 기한이 되었을 때부터 지체에 대한 책임이 생긴다. 돈을 빌린 경우라면 지체를 했으니 그때부터는 이자를 물어줘야 한다. 이게 "채무이행의 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기한이 도래한 때로부터 지체책임이 있다."의 의미다. 


정해진 기한이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00년 00월 00일까지'가 아니라 "내가 아무개로부터 돈을 받으면 갚으마."와 같이 어떤 조건을 두고 채무가 생기는 경우를 말한다. '00년 00월 00일까지'와 같은 경우를 민법 제387조 제1항에서 '확정한 기한'이라 하고 '내가 아무개로부터 돈을 받으면'과 같은 경우를 '불확정한 기한'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자. '채무이행의 확정한 기한', '채무이행의 불확정한 기한'이라는 표현이 과연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국어 표현인가. 아마 웬만한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은 국어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억지스럽기 짝이 없는 표현이다.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법무부가 2019년 제20대 국회에 제출한 민법개정안에 훌륭한 대안이 들어 있다. 이렇게 바꾸었다.


387(이행기와 이행지체① 채무이행에 확정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기한이 된 때부터 지체책임이 있다채무이행에 확정되지 않은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는 기한이 되었음을 안 때부터 지체책임이 있다.


'채무이행의 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을 '채무이행에 확정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이라 했고 '채무이행의 불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을 '채무이행에 확정되지 않은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이라 했다. 이렇게 하니 훨씬 자연스럽지 않은가. 법무부 민법개정안을 작성한 법률가들은 기존 민법 제387조의 '채무이행의 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과 '채무이행의 불확정한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이 다듬어야 할, 문제 있는 표현임을 인식하고 이렇게 바꾸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법무부가 제출한 민법개정안은 제20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았고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민법은 1950년대에 제정될 때에 일본 민법을 참고한 흔적이 역력하다. 민법 제387조에 해당하는 일본 민법 조문은 다음과 같다.


第四百十二条 債務の履行について確定期限があるときは、債務者は、その期限の到来した時から遅滞の責任を負う。

2 債務の履行について不確定期限があるときは、債務者は、その期限の到来した後に履行の請求を受けた時又はその期限の到来したことを知った時のいずれか早い時から遅滞の責任を負う。


일본 민법에 '確定期限', '不確定期限'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 민법에서도 그냥 그대로 '확정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 '불확정 기한이 있는 경우에는'이라고만 했더라도 지금처럼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치 민법 제148조에서 '미정인 동안에'라고만 했더라도 괜찮았을 것을 '미정한 동안에'라 하는 바람에 대단히 어색하게 된 경우나 마찬가지다. 


'확정한 기한', '미확정한 기한' 같은 말은 법조문에만 있는 이상한 표현이다. 국어답지 않을 뿐 아니라 무슨 뜻인지 얼른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런 어색한 표현은 법에 대한 국민의 접근을 가로막는다. 마치 철조망이나 장애물 같다. 개선이 절실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알고 보면 쉬운 내용인데 힘이 잔뜩 들어간 문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