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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Sep 25. 2024

알고 보면 쉬운 내용인데 힘이 잔뜩 들어간 문장

'미정한 동안에'라는 말은 없다

민법 총칙 제148조는 조건부권리에 관한 규정이다. 다음과 같다.


민법

제148조(조건부권리의 침해금지)

조건있는 법률행위의 당사자는 조건의 성부가 미정한 동안에 조건의 성취로 인하여 생길 상대방의 이익을 해하지 못한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이지만 이 문장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 같지 않다. 아니 몇 번을 되풀이해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것 같다. '법률행위', '조건의 성부', '미정한 동안' 같은 말이 꽤나 생소할 뿐 아니라 '이익을 해하지' 같은 좀체 들어보지 못한 고풍스러운 말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민법 제148조는 조건부권리에 관한 조항으로 알고 보면 사실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다. 만일 누가 "너가 이번 변호사시험에 합격하면 너하고 결혼할게."라고 애인에게 약속했다고 치자. 그런데 애인이 변호사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딴 사람과 결혼을 해버린다면 그 약속을 믿고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던 애인은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게 제148조다. 그러니 조건이 있는 법률행위의 당사자는 조건의 성취 여부가 정해질 때까지는 그와 관련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알고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은 내용인데 민법 제148조는 왜 이리 어렵게 느껴질까. 그 이유는 일본 민법 조문을 무비판적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해당하는 일본 민법 제128조는 다음과 같다.


일본 민법

第百二十八条 条件付法律行為の各当事者は、条件の成否未定である間、条件が成就した場合にその法律行為から生ずべき相手方の利益を害することができない。


일본 민법에 '成否', '未定', '利益を害する' 같은 말이 쓰이고 있고 우리 민법은 이를 그대로 가져왔다. 그 결과 마치 외국어 같이 어색하고 난해하게 느껴지고 말았다. 그런데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개선 움직임이 있었다. 2019년 법무부가 제20대 국회에 제출한 민법개정안은 민법 전체를 우리말답고 쉽게 새로 썼다. 이 개정안의 제148조는 다음과 같다.


148(조건부 권리의 침해 금지) 조건이 붙어 있는 법률행위의 당사자는 조건의 성취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동안 조건의 성취로 생길 상대방의 이익을 해칠 수 없다.


얼마나 알기 쉬운가! '成否'는 성취 여부'로 바뀌었고 '未定한 동안에'는 '확정되지 않은 동안에'로 바뀌었다. '利益을 해하지'는 '이익을 해치지'로 고쳐졌다. 물론 이렇게 바뀌어도 일반인은 이 조문의 속뜻을 쉽사리 알기는 어렵고 법률 전문가의 해설을 들어야 취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정안이 현행 조문에 비해서는 훨씬 편하게 읽히는 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물론 개정안도 한 가지 아쉬움은 있다. 일본 민법에는 '条件の成否が未定である間'처럼 끝에 ''가 있다. ''는 국어의 ''에 해당하는데 개정안은 '' 없이 '조건의 성취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동안'라 했다. 아마 전체 문장의 주어인 '조건이 붙어 있는 법률행위의 당사자'에 ''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 되풀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건의 성취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동안에'이라 하지 않고 ''을 뺐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되풀이되더라도 '조건의 성취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동안'이었더라면 한결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어쨌거나 법무부가 2019년 제20대 국회에 제출한 민법개정안은 국회에서 심의하지 않아 폐기되고 말았다. 그 결과 지금도 제정 당시의 "조건있는 법률행위의 당사자는 조건의 성부가 미정한 동안에 조건의 성취로 인하여 생길 상대방의 이익을 해하지 못한다."가 그대로이다. 도무지 외계어 같지 않은가.


국어에 '미정한 동안에'란 말은 쓰이지 않는다. '확정되지 않은 동안에'나 '정해지지 않은 동안에'가 쓰인다. 더 양보해서 '미정 동안에'라고만 했어도 '미정 동안에'보다는 낫다. '미정 동안에'가 일본 민법의 '条件の成否が未定である間'을 제대로 옮긴 것이기도 하다. 민법 제148조는 일본 민법을 가져온 것이지만 제대로 옮겨오지도 못하고 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국어에 '미정한'이란 말은 없다. 민법은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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