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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Sep 26. 2024

상대방이 확정한 경우에는

번역 오류

민법은 법 중의 법으로 법과대학에서, 로스쿨에서 가장 비중이 큰 과목이다. 분량이 방대하고 내용이 심오하다. 그래서 민법 교과서는 참으로 두툼하다. 조문은 짧아도 각 조문에 들어 있는 깊은 뜻과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학설이 소개돼 있어서다. 


우리는 건국을 하고도 10여 년 동안 우리 민법이 없이 일제강점기에 쓰던 조선 민사령, 즉 일본 민법을 썼다. 건국 직후부터 물론 법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민법을 비롯한 기본법을 제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실의 하나로 1958년 2월에 민법이 제정, 공포됐고 시행은 1960년 1월 1일부터 했다.


그런데 제정된 민법 역시 일본 민법에 크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조항이 일본 민법 조문을 그대로 번역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번역을 한국어답게 하지 못하는 바람에 이상한 한국어 표현이 되고 만 조문이 적지 않다. 민법 제142조도 그렇다.


민법

제142조(취소의 상대방)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의 상대방이 확정한 경우에는 그 취소는 그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 하여야 한다.


민법 제142조를 해당하는 일본 민법 조문과 비교해 보자. 일본 민법에는 '취소'에 '추인'이 더 들어 있을 뿐 사실상 같다.


(取消し及び追認の方法)

第百二十三条 取り消すことができる行為の相手方が確定している場合には、その取消し又は追認は、相手方に対する意思表示によってする。


그런데 '확정한'에 해당하는 일본 민법의 표현은 '確定している'이다. 일본어 '確定している'를 '확정한'으로 옮긴 것은 적절하고 정확했나. 아니다. 우선 '상대방이 확정한 경우에는'이라는 한국어 표현이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지 않은가! 상대방이 무엇을 확정했단 말인가. 일본어 '確定している'는 '확정되어 있는' 또는 '확정된'이라고 번역해야 한국어답고 무엇보다 뜻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상대방이 확정한 경우에는'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는 모호한 말이다. 과연 법무부가 2019년 제20대 국회에 제출한 민법개정안은 제142조를 다음과 같이 고쳤다.


142(취소의 상대방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의 상대방이 확정된 경우에는 그 법률행위의 취소는 그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써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국회에서 처리하지 않아 폐기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민법 제142조는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의 상대방이 확정한 경우에는 그 취소는 그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 하여야 한다."이다. 이 조문의 뜻은 대단히 명료하다. 법률행위의 상대방이 정해져 있으면 법률행위의 취소는 '제3자가 아닌 바로 그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써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다. 이 명료한 법리가 왜 괴상한 조문으로 표현되어 있어야 하나. 왜 그걸 바로잡지 못하나. 온갖 분야에서 한국은 후진성을 탈피하고 선진 대열에 들어섰지만 국가 기본법만큼은 이만저만 낙후하지 않았다. 꼭꼭 움켜쥐고 개선하려 하지 않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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