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문규범의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
민법은 우리나라의 1,700개 가까운 법률 중에서 가장 방대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법률이다. 그야말로 법 중의 법이다. 모든 국민이 살아가면서 누리는 기본적인 권리 그리고 이행해야 하는 기본적인 의무가 민법에 담겨 있다. 그런 만큼 일반 국민이 민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법을 알아야 법을 지키고 법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방대한 민법에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희한한 문장이 적지 않다. 제162조도 그런 예 중 하나이다. 제162조는 다음과 같다.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고 했다. 채권을 갖고 있다면 10년 내에 행사하라는 게 이 조문의 입법 취지다. 10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채권이 소멸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소멸시효가 완성한다'고 했다. 소멸시효가 완성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말이 되는가?
'소멸시효가 완성된다'와 비교해 보자. '소멸시효가 완성한다'와 '소멸시효가 완성된다'는 어느 쪽이 자연스러운가. 물으나 마나 '소멸시효가 완성된다'가 자연스럽다. 아니 '소멸시효가 완성한다'는 아예 말이 틀렸다.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완성한다'는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말인데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에는 목적어가 없기 때문이다. 목적어가 없는데 '완성한다'라는 말을 쓴 자체가 잘못됐다. 이렇게 말이 안 되는 문장을 비문이라 하는데 민법 제162조는 비문이다. 제1항, 제2항 똑같이 비문이다.
그런데 이 비문이 1958년 2월에 제정되었고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2025년인 지금도 그대로이다. 말이 안 되는 문장이 요지부동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묻고 싶은 게 있다.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는 어문규범을 지켰는가 안 지켰는가? 말이 안 되는 문장인데 어문규범을 지켰을 리가 있을까. 도대체 어문규범이 무엇인가.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라는 문장은 문법을 어겼고 그래서 비문인데 문법은 어문규범인가 아닌가. 필자의 생각은 단연코 문법은 어문규범이라는 것이다.
말을 하든 글을 쓰든 우리는 문법에 따라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문법을 지켜서 말을 하고 문법을 지켜서 글을 쓴다. 이건 우리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무언의 약속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문법을 지키면서 하는 것이다. 문법을 지키지 않으면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 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법은 그만큼 암묵적인 강력한 약속이다. 문법이 어문규범에 들지 않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아니 문법이야말로 어문규범의 핵심이다. 물론 문법이 어디서 어디까지냐 하는 문제가 있을 수는 있다. 문법에 속하는 것들을 일일이 나열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문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린 아기 때 말을 배우면서부터 문법을 지키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말을 배우는 것 자체가 문법을 배우는 것이다. 한국말을 배우는 어린이는 한국말의 문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놀랍게도 법에는 어문규범에 문법이 들어 있지 않다. 국어기본법이라는 법이 있다. 이 법 제3조에 어문규범이 정의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문법은 들어 있지 않고 한글 맞춤법, 표준어 규정, 표준 발음법, 외래어 표기법,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등 국어 사용에 필요한 규범이 어문규범이라 하고 있다. 문법은 너무 당연하니까 어문규범의 정의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표준국어대사전은 더욱 노골적으로 어문규범을 한글 맞춤법, 표준어 규정, 외래어 표기법,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국한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필자가 보기에는 어이없다. 만일 어문규범이 '한글 맞춤법, 표준어 규정, 외래어 표기법,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만이라면 민법 제162조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는 '한글 맞춤법, 표준어 규정, 외래어 표기법,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어긴 게 없으니 어문규범을 지킨 문장인가. 말이 안 되는 문장이 어떻게 어문규범을 지킨 문장인가.
어문규범의 개념이 넓어져야 한다. 마땅히 어문규범에 문법이 들어가야 한다. 맞춤법만 지키면 문법을 어겨 말이 안 되는 문장도 괜찮다는 건가. 아닐 것이다. 천부당만부당하지 않나. 문법도 어문규범이다. 아니 문법이야말로 어문규범의 핵심이다. 국어기본법은 개정돼야 하고 국어사전의 어문규범 뜻풀이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는 이상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 같은 괴상하고 고약한 문장이 고쳐지기 어려울지 모른다. 당장 고쳐야 마땅한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