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신의에 좇아?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by 김세중

법고을은 판례를 비롯한 다양한 법률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다. 법원도서관이 운영하는 법률지식공유 플랫폼이다. 2024년 1월 4일 대법원이 선고한 사건의 판결요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판결요지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판결요지】

[1] 확정판결에 의한 권리라 하더라도 신의에 좇아 성실히 행사되어야 하고 판결에 기한 집행이 권리남용이 되는 경우에는 허용되지 않으므로, 집행채무자는 청구이의의 소에 의하여 집행의 배제를 구할 수 있으나, 확정판결은 소송당사자를 기속하는 것이므로 재심의 소에 의하여 취소되거나 청구이의의 소에 의하여 집행력이 배제되지 아니한 채 확정판결에 기한 강제집행절차가 적법하게 진행되어 종료되었다면 강제집행에 따른 효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고, 강제집행이 이미 종료된 후 다시 확정판결에 기한 강제집행이 권리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될 수 없다는 등의 사유를 들어 강제집행에 따른 효력 자체를 다투는 것은 확정판결의 기판력에 저촉되어 허용될 수 없다.


"확정판결에 의한 권리라 하더라도 신의에 좇아 성실히 행사되어야 하고"라 했다. 비록 민법 제2조 제1항이 "권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라 되어 있지만 이 조항의 '신의에 좇아'는 일본 민법 제1조 제2항의 '信義に従い'를 잘못 번역한 말이다. '信義に従い'는 1896년 제정된 메이지 민법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런데 우리말 동사 '좇다'는 목적어를 취해야 하고 목적어에는 목적격조사 '을/를'이 와야 한다. 따라서 최소한 '신의를 좇아'라고 해야 한다. 아니면 '신의에 따라'나 '신의를 지켜'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요컨대 '신의에 좇아'는 한국어의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이 안 되는 표현이다. 일본어 흔적이 고스란히 남어 있는 말이다.


민법을 진작에 고쳐야 하는데 국회가 민법을 그냥 그대로 두고 있고 대법원이라는 최고의 사법기관에서 내놓은 판결 요지에 버젓이 틀린 말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비록 민법 조문에는 '신의에 좇아'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왜 대법원은 판결요지에서 '신의를 지켜'나 '신의에 따라'라 고쳐 쓰지 못하나. 악법도 법이라서 그대로 쓰고 있나? 사법부의 보수성 자체를 탓하는 게 아니다. 지킬 것을 지켜야지 당장 털어내도 시원치 않은 것을 명색이 최고법원에서 따르고 있으니 보기 딱해서 하는 말이다. 올해로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일본어 찌꺼기를 걷어내야 한다. '신의에 좇아'는 우리말이 아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MZ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