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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또는 관습법에 의하는 외에는

구(舊)민법보다도 못하다

by 김세중

필자는 2022년 11월 14일 한 조간신문에 민법에 비문이 많으니 고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기고를 했다. 그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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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고가 나가고 신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떤 독자가 내가 쓴 기고문의 한 구절에 의문을 표시해 왔는데 그 독자에게 어떻게 답하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필자가 "민법이 정부 수립 후 10년 동안 없었고 일본 민법을 썼다."고 했는데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 독자가 물었다는 것이다. 독자로서는 충분히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1948년에 정부 수립을 했는데 그 후 10년 동안 우리나라의 민법이 없었고 일본 민법을 썼다니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표현에 아무 문제가 없으며 우리나라는 정부 수립 후에도 10여 년을 일본 민법을 썼다고 답해 주었다.


그 후 필자는 우리나라가 1958년에 민법을 공포하기 전에 사용했던 민법이 무엇인지 알고자 무척 노력했다. 그 민법을 구민법(舊民法)이라고 하는데 구민법의 실체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일부를 입수할 수 있었다. 1950년대까지 우리가 썼던 구민법은 일본어로 되어 있었을까, 한국어로 되어 있었을까. 한국어로 되어 있었다. 일본 민법이지만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다만 여전히 풀지 못한 의문은 한국어판 구민법이 단 하나의 정본만 있었는지 아니면 여러 가지 판이 있었는지이다. 어쨌든 필자는 1938년에 간행된 구민법을 구했다.


1938년이 어느 땐가. 아직 일제강점기 아니었나. 그때의 민법을 얻긴 했으나 그것이 1950년대말까지 사용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한국어로 적힌 구민법을 읽으면서 대단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구민법 제175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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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조

물권은 본법 기타의 법률에 정하는 외에는 이를 창설할 수 없다.


여기서 무엇이 놀랍다는 것인가.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본법 기타의 법률에 정하는 외에는'이다. '본법 기타의 법률에 정하는 외에는'에 ''이 들어 있다. 즉, '정하는'이라는 동사 다음에 ''이라는 의존명사가 나오고 이어서 ''라는 의존명사와 그에 붙은 조사 '에는'이 나온다. 요컨대 '외에는' 앞에는 명사 또는 의존명사가 나와야 한다는 국어 문법을 잘 지키고 있다.


그런데 구민법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 만든 민법의 해당 조문은 어떤가. 1958년 2월 22일에 공포된 민법의 제185조는 다음과 같았다. 이 조문은 지금도 그대로다.


제185조(물권의 종류) 물권은 법률 또는 관습법에 의하는 외에는 임의로 창설하지 못한다.


'의하는'이라는 동사 다음에 명사 또는 의존명사 없이 바로 '외에는'이 왔다. 이는 국어 문법을 어긴 것이다. 문법을 어겼으니 말이 안 된다. 구민법은 국어 문법을 지켰는데 새 민법은 국어 문법을 어겼다. 후퇴도 이런 후퇴가 없다. 드디어 우리의 독자적인 민법을 가지게는 되었지만 법조문이 문법에 맞지 않는다. 1950년대 당시 민법 제정에 참여했던 법률가들의 국어 문장 수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올해로 민법 공포 67년을 맞는다. 왜 이 기나긴 세월 동안 이런 문법 오류를 바로잡지 않고 지내 왔나. 국어에 대한 무관심과 법에 대한 맹목적 순종이 겹쳤다고 본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민법은 일제강점기에 쓰던 구민법보다 오히려 국어 사용 면에서 뒤졌다. 적어도 일부 조문은 그렇다는 것이다. 기득권의 힘이 이리도 무서울 줄 몰랐다. 지금이라도 깨야 한다. 문법에 맞지 않는 법조문이라니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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