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알 수 없는 법조문
필자는 2022년 11월 14일자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공포되었지만 민법은 1958년에 제정, 공포되었다. 범죄자에게만 적용하는 형법, 상인에게만 적용하는 상법과 달리 민법은 모든 국민에게 적용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법이다. 그 민법이 정부 수립 후 10년 동안 없었고 일본 민법을 썼다."라고 썼었다. 이 기사가 나고 신문사로 어떤 독자가 문의를 해왔단다. 정말 정부 수립 후 10년 동안 우리나라에 민법이 없었느냐고. 아마 그 독자는 믿기 어려워서 그렇게 물었겠지만 사실이었다. 우리 민법은 없었고 1950년대까지 우리는 일본 민법, 이른바 의용민법을 썼다.
하지만 우리의 민법을 가지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있었다. 1948년 정부는 법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법률 제정에 착수했다. 6.25 전쟁으로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민법안은 1954년 국회에 제출되었고 1957년 11월에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국회를 통과하고 대통령이 공포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법률은 공포와 동시에 시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시행하는 경우도 많다. 민법은 참으로 방대한 법률인데 시행일을 두고 국회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민법 시행일을 1960년 1월 1일로 하자는 안에 대해서 왜 2년이나 뒤에 시행하느냐며 당장 시행하자고 주장하는 의원이 있었다. 최병국 의원이 왜 당장 시행하지 않고 오랜 준비기간을 두느냐고 질의했다. 이에 대해 법제사법위원장 대리인 장경근 의원은 2년이라는 준비 기간은 결코 길지 않다며 독일 민법은 공포한 지 4년 후, 스위스 민법은 공포한 지 5년 후에 시행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원안대로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하는 것으로 됐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장경근 법제사법위원장 대리가 2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함을 설명하면서 댄 이유이다. "법률이라는 것은 우리 민주국가의 법률은 먼저 국민이 다 알아서 이해시키고 납득시킨 후에 이것이 시행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라고 했다. 말이 좀 꼬였다. "민주국가의 법률은 먼저 국민이 다 알아서 이해하고 납득한 후에 시행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민주국가의 법률은 법률가들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다 알아서 이해하고 납득한 후에 시행해야 한다니 얼마나 민주적인 생각인가! 약 70년 전에 민법 제정을 주도한 국회의원이 이런 훌륭한 생각을 갖고 있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은 이렇게 훌륭하지만 실제로 마련된 민법 법조문은 어떤가. 수많은 이상한 문장이 있지만 일일이 다 들어 보일 수는 없으니 여기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인다.
민법안 제2조 제1항
권리의행사와의무의이행은신의에좇아성실히하여야 한다
민법안 제162조 제1항
채권은십년간행사하지아니하면소멸시효가완성한다
띄어쓰기도 하지 않고 마침표도 찍지 않았다. 일본어에서 띄어쓰기를 하지 않으니 그대로 따른 것 아닌가. 더 중요한 것은 '신의에 좇아', '소멸시효가 완성한다' 같은 표현이 국민이 알 수 있는 말인가. 우리 국어에 있는 표현인가.
말은 국민이 다 알아서 이해하고 납득한 후에 시행해야 하니 2년의 준비 기간을 둔다고 했지만 법조문 자체가 도무지 국민이 이해할 수 있지 않다. 법조문이 반듯하게 작성한 뒤에 그렇게 말했다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겠지만 조문 자체가 문제투성이면서 국민이 이해하고 납득해야 하니까 준비기간을 둔다고 했으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당시 법률가들의 국어 수준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에 푹 젖어 있었을 것이다. 법전편찬위원들은 대체로 일본 대학(東京帝大, 日本大, 明治大, 中央大)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비교적 젊은 위원들은 1920년대나 1930년대에 경성제대에서 공부했지만 역시 일본인 교수들로부터 배우지 않았겠나. '신의에 좇아', '소멸시효가 완성한다' 등은 2025년인 지금도 우리 민법에 그대로 있다. 이건 우리말이 아니다. 한국어에 그런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