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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한글을 망치고 있다

고압적 규정

by 김세중

민법에는 참으로 많은 '그러하지 아니하다'가 나온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지 않다'고 하지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법은 '나 법이요' 하고 티를 낸다. 법은 뭔가 달라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한글 맞춤법은 민법과 같은 은 아니고 행정부(문화체육관광부) 고시 사항이다. 고시도 넓은 의미의 법이다. 한글 맞춤법이란 말이 들어 있지 않나. 한글 맞춤법 제30항은 다음과 같다.




황당하다. '받치어 적는다'고 했다. 누가 '받치어 적는다'고 말하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국민의 언어생활을 규율하는 한글 맞춤법에 사람들이 좀체 쓰지 않는 말을 쓰고 있다. 왜 두루 널리 쓰이는 말 대신 낯설기 짝이 없는 표현을 쓰나.


더욱 어이없는 것은 정작 국어사전은 한글 맞춤법 제30항을 인용하면서 '받치어 적는다'고 하지 않고 '받쳐 적는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을 보라.




왜 한글 맞춤법에 있는 대로 '받치어 적는다'고 하지 않고 '받쳐 적는다'고 했을까. '받치어 적는다'고 하자니 너무 독자들에게 어색하게 비칠까봐 차마 '받치어'라고 하지 못한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왜 굳이 '받쳐'로 바꾸었을까. 한글 맞춤법 제30항의 '받치어'는 '받쳐'로 고쳐야 마땅하다. 규정이 고압적인 느낌을 풍겨서는 곤란하다.


개탄스러운 것은 실은 '받치어'가 아니다. '선짓국'이 문제다. '받치어'야 '받치어'면 어떻고 '받쳐'면 어떤가. 같은 뜻이 아닌가. 규정이란 엄숙해 보여야 하니 '규정'이라는 문체적 특성상 준말이 아니고 본말로 썼다고 치자. 그러나 '선짓국'은 아니다.


이 말은 식당 간판에도 써야 하고 식당 메뉴판에도 써야 하는 말이다. 그런데 전국 어느 식당엘 가봐도 선지국이지 선짓국이 아니다. 선짓국은 국어사전에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의 한 지인은 국어사전에 선짓국이라 돼 있다고 필자가 말하니 '멀쩡한 한글을 망치고 있다'고 흥분했다. 이럴 바에는 한글 맞춤법은 없는 게 차라리 낫다. 만일 한글 맞춤법 제30항이 없었다면 국어사전이 표제어로 선짓국을 내걸었겠는가. 당연히 선지국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한글 맞춤법이 언어 생활의 훼방꾼, 족쇄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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