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국민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과거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뼈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가 최근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보다 높다고 한다. 실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재역전되지 않도록 고삐를 조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근대화의 역사는 일본이 대단히 빨랐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서구 문물을 급속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법부터 그러했다.
우리는 독자적인 민법을 1958년에야 가지게 되었지만(그나마도 일본 민법에 크게 의존했다) 일본은 무려 1890년에 민법을 마련했다. 이 민법전은 프랑스 법학자 귀스타브 에밀 부아소나드가 나폴레옹법전을 모델로 하여 주도적으로 만든 것인데 많은 논란 끝에 시행에는 이르지 못했고 6년 뒤인 1896년에 독일 민법전을 모델로 한 민법전이 일본에서 공포되었다.
어찌 됐든 일본 민법전은 일본에서만 쓰인 것은 아니었고 20세기 전반기에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만주국에서도 쓰였다. 이를 의용민법이라 한다. 의용민법은 이른바 '구민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59년 12월 31일까지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1958년 2월 22일 공포된 '신민법'은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신민법이라 불렀지만 오늘날은 '신'이 떨어져 나가고 그냥 민법이다. 오늘 이 민법에 대해 잠깐 언급할 게 있다.
현재 우리나라 민법 제209조는 다음과 같다.
자력구제라는 말은 누구라도 알만한 말일 것이다. 경찰이나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구제하는 게 자력구제다. 남이 내 물건을 뺏으려 할 때 뺏기지 않고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민법 제209조 때문이다. 그런데 제2항에 희한한 단어가 하나 들어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직시라는 말이다.
직시가 뭔가. 국어사전에 직시를 찾아보면 直視라 돼 있고 '정신을 집중하여 어떤 대상을 똑바로 봄.'이라 뜻풀이돼 있다. 그러나 민법 제209조 제2항의 '침탈후 직시 가해자를 배제하여'에서 직시는 '정신을 집중하여 어떤 대상을 똑바로 봄.'이라는 뜻과 관계 없다. 다른 말이다. ''침탈후 직시 가해자를 배제하여'에서 직시는 바로, 당장, 즉각이란 뜻이다. 이런 뜻으로 한국사람들은 누구나 즉시라는 말을 쓰지 직시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조문에는 즉시가 아니고 직시다. 1958년 2월 22일 민법이 공포되었을 때 원문은 直時고 지금도 정통 법전에는 直時라 돼 있다. 도대체 直時는 무슨 뜻이고 어느 나라 말인가. 1958년 당시 민법을 공포할 때 이 조문을 작성한 이들은 直時라는 말을 어디서 가져왔을까.
누구라도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텐데 필자는 여러모로 알아보았지만 아직도 이 直時의 정체와 출처에 대해 답을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잠정적인 결론은 단순한 오류요 실수였다는 것이다. 일본어에도 直時라는 단어는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 민법에도 당연히 直時라는 말은 없다. 현재 일본 민법에는 자력구제와 관련하여 卽時라는 말은 없어 보이지만 1930년대의 일본 민법에는 자력구제와 관련해 卽時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 증거가 있으니 1937년 일본 민법과 만주국 민법을 대조해 보인 자료에 아래와 같은 게 있다. 일본어나 중국어에 모두 卽時가 쓰이고 있지 直時는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1958년에 공포된 대한민국의 민법에 直時가 쓰이게 되었는가. 실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단순한 오류요 실수였다고 보는 것이다.
광복 이후 이 땅에 아마도 수십만 명의 법조인이 활동했을 것이다. 현재도 변호사가 3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현직 검사, 판사도 각각 수천 명이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예 깨닫지 못하고 있을까. 민법은 하고 많은 법률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법률이다. 역사도 오래되었다. 그러나 민법 제209조 제2항의 직시는 1958년 2월 22일 공포 이래 요지부동 그대로다. 이런 해괴한 말은 법에 대한 국민의 접근과 이해를 가로막는다. 국어에 없는 정체불명의 말을 법조문에서 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뭔가.